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사기시리즈 제1권>에서는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본기 및 세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특히, 사마천과 사기를 자세히 알기 위해 각권 공히“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부분을 첨가하였다.
사기시리즈 제2권(사기열전 제1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편 백이열전부터 제18편 춘신군열전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3권(사기열전 제2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9편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부터 제33편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4권(사기열전 제3권)에서는 제34편 전담열전(田儋列傳)부터 제53편 남월열전(南越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5권(사기열전 제4편)에서는 제54편 동월열전(東越列傳)부터 제70편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를 다룬 후, 마지막으로 사마천의 편지인 보임안서를 싣는다.(원래 보임안서는 사기에는 없고 반고의 한서에 실려 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2권>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 및 역사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배경
1)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건국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기열전
19.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범저(范雎)
(2) 채택(蔡澤)
3) 고사성어
(1) 누란지위(累卵之危)
(2) 항룡유회(亢龍有悔)
(3) 성공자퇴(成功者退) (4) 월만즉휴(月滿則虧)
(5) 탁발막수(擢髮莫數)
(6) 청운직상(靑雲直上) (7) 원교근공(遠交近攻)
(8) 애자필보(睚眦必報)
4)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전문
20. 악의열전(樂毅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악의(樂毅)
3) 고사성어(생략)
4) 악의열전(樂毅列傳) 전문
2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염파(廉頗)
(2) 인상여(藺相如)
3) 고사성어
(1) 완벽(完璧)과 하자(瑕疵)
(2) 부형청죄(負荊請罪)
(3) 문경지교(刎頸之交)
(4) 포의지교(布衣之交)
(5) 노발충관(怒髮衝冠)
4)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전문
22. 전단열전(田單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전단(田單)
3) 고사성어
(1) 안도(安堵)
(2) 출기제승(出奇制勝)
(3) 화우지계(火牛之計)
(4) 물망재거(勿忘在莒)
4) 전단열전(田單列傳) 전문
23.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노중련(魯仲連)
(2) 추양(鄒陽)
3) 고사성어
(1) 명주암투(明珠暗投)
(2) 걸견폐요(傑犬吠堯)
4)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전문
2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굴원(屈原)
(2) 가생(賈生)
3) 고사성어
(1) 구사일생(九死一生)
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전문
25.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여불위(呂不韋)
3) 고사성어
(1) 일자천금(一字千金)
(2) 기화가거(奇貨可居)
4)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전문
26. 자객열전(刺客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본문 참조)
3) 고사성어
(1) 방약무인(傍若無人)
4) 자객열전(刺客列傳) 전문
27. 이사열전(李斯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이사(李斯)
3) 고사성어
(1) 소재소거 인고택지(鼠在所居 人固择地)
(2) 성대공자 재인하흔수인지(成大功者 在因瑕衅而遂忍之)
(3) 간축객령(諫逐客令)
(4) 분서갱유(焚書坑儒)
(5) 지록위마(指鹿爲馬)
4) 이사열전 전문
28. 몽염열전(蒙恬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몽염(蒙恬)
3) 고사성어
(1) 성명낭자(聲名狼藉)
4) 몽염열전(蒙恬列傳) 전문
2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장이(張耳)
(2) 진여(陳餘)
3) 고사성어
(1) 물경지교(勿頸之交)
4)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전문
30.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위표(魏豹)
(2) 팽월(彭越)
3) 고사성어
(1) 석권(席卷)
(2) 운증용병(雲蒸龍變)
4)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전문
31. 경포열전(鯨布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영포(英布)
3) 고사성어(생략)
4) 경포열전(鯨布列傳) 전문
3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한신(韓信)
3) 고사성어
(1) 과하지욕(袴下之辱) 표모반신(漂母飯信)
(2) 소하월하추한신(蕭何月下追韓信)
(3) 성역소하(成亦蕭何) 패역소하(敗亦蕭何)
(4)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5) 토사구팽(兎死狗烹)
(6) 다다익선(多多益善)
(7) 배수지진(背水之陣)
4)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전문
3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한왕 신(韓王 信)
(2) 노관(盧綰)
3) 고사성어
(1) 명성과실(名聲過實)
4)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전문
<참고자료>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ly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그림 Historia와 헤로도투스(출처: 구글)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 ‘사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그림 사마천의 초상화(출처: 구글)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아래에서 시기별로 나눠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사마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동상(구글)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마는 성이고 이름은 천이다.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부여받는 이름으로, 관명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이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 정도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으로 천문과 달력, 그리고 고전도 능하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마천이 7세 때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은 용문의 산간벽지에서 소를 치는 등 목축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천은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 사마담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듯이, 사마담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고전을 읽었고, 특히 역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4살 때부터 사마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10대 무렵에는 고문서를 읽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다양한 인재들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선조들은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30여년간 한무제 밑에서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했다.
사관이란 원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관이라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은 상태로, 오직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서의 편찬을 계획했다.
사마담은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이 13세(133년)무렵부터 고향에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와 위수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장답사를 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자질과 지식을 쌓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마담은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현명한 임금과 충신과 의사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마천은 20세(126년)경, 사마천은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여행하기 시작했다.
약 2-3년간의 여행이었으나, 훗날 사기 집필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마천은 이후 낭중(郎中), 즉 황제의 비서관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몸소 체험하고 터득했다.
그 즈음,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하늘과 땅에 드리는 봉선제를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도 당연히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사마담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된다.
사마담은 탄식하며 낙담하여 결국은 화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이 사건...
참고로 봉선이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이다.
봉선(封禪)은 제후들이 선(禪)을 통하여 천자(天子)로 부터 봉작(封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봉작(封爵)은 천자(天子)가 제후들에게 봉선제(封禪祭)를 열고 각 제후들은 태산의 원구단(圓丘壇)에 모여 선(禪)을 행한 뒤 그 평가가 내려지고 선통(禪統)의 깊고 낮음에 따라 천자(天子)가 작위와 땅을 봉(封)해 주는 것을 봉작(封爵)이라고 한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
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그림 대나무로 만든 죽간, 나무로 만든 목간(출처: 구글)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2. 왜 사기인가?
왜 사마천의 사기인가?
사기는 중국고대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3천 여년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 사실기록이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고증과 기행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 - 즉 기전체를 창안했다.
중국의 역사는 국가에서 관장하는데, 이후의 24정사 모두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가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는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중국의 불타 없어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기는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가미된 감정을 이입시킨다. 결국 문사철이 가미된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기니긴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의 메아리를 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절대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꼿꼿한 표상’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사마천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켜 역사상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위를 주는 것은 물론 지주가 되고 있다.
제3편 사기열전
19.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1) 개관
범수채택열전은 변설가 범수(范睢)와 채택(蔡澤)에 대한 기록이다.
위나라 수가를 섬겼던 범수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모함을 당해 수가와 위제로 부터 갖은 형벌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위나라의 정안평이라는 사람이 범수가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후들의 힘이 강성하여질 무렵, 그 중 하나인 양후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넘어 멀리 있는 제나라를 치려하자 범수가 진나라 소왕에게 원교근공(먼 나라와 국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치는 것)을 제안한다.
범수는 어려운 수많은 고비를 넘어 결국 재상에 오른다.
이때 연나라 사람 채택이라는 사람이 범수에게 여러 재상들과 제후들의 공과 과를 열거하면서“펼 줄만 알고 굽힐 줄은 모르며, 앞으로 갈 줄만 알고 되돌아 올 줄은 모른다”라고 말하면서 범수가 제상에서 내려올 것을 권고한다.
범수는 진나라 소왕에게 채택을 소개하고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채택도 10년간 재상에 있다가 공을 쌓고 스스로 물러난다.
범수와 채택은 나그네의 몸으로 재상의 자리에 까지 오른 변사들이다.
2) 등장인물소개
(1) 범저(范雎) ? - 기원전 255)
그림 범수(출처: 구글)
그는 범차(范且)라고도 하고, 범수(范睢)라고도 한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자는 숙(叔)이다.
그는 변설에 능했다.
그는 위상(魏相) 위제(魏齊)를 위해 일하다가 모함으로 태형을 당해 허리뼈가 부러진 뒤 이름을 장록(張祿)으로 고치고, 왕계(王稽)와 정안평(鄭安平)의 도움으로 진(秦)나라로 달아났다.
범수는 소양왕(昭陽王)을 섬기며 상국(相國)을 지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제안해 큰 성공을 거뒀는데, 이것이 나중에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통일하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명장 백기(白起)와 함께 명성이 높아지자 그를 자살하게 한 뒤 정안평을 장군에 앉혔다. 응(應)에 봉해져 응후(應侯)라고도 부른다.
나중에 조(趙)나라를 공격했다가 정안평이 전투에서 지고 조나라에 항복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일설에는 진왕에게 논죄를 당해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채택은 공을 세운 후에는 물러나는 것이 최상의 도라고 재상인 범수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한 후 재상이 되었다.
후에 그도 스스로 물러나 평안한 말년을 보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월만즉휴(月滿則虧)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2) 채택(蔡澤, 미상 – 미상)
전국 시대 연(燕)나라 사람으로, 변설에 능하고 지략이 풍부해 제후(諸侯)들에게 다니면서 유세를 했다.
진소왕(秦昭王) 52년 진상(秦相) 범수(范雎)가 추천한 정안평(鄭安平)과 왕계(王稽)가 죄를 졌다는 소식을 듣고 진나라로 들어가 범수에게 사퇴할 것을 권고했다.
그림 채택(출처: 구글)
범수가 소왕에게 추천하여 객경(客卿)이 되었다.
얼마 뒤 범수가 병을 이유로 재상의 직위를 내놓자 마침내 범수를 대신해 재상이 되고, 서주(西周)를 공격해 멸망시킬 계책을 내놓았다.
다른 사람이 모함하자 후환이 두려워 즉시 재상에서 물러나고 강성군(綱成君)이라 불렀다.
진나라에서 10여 년 동안 머무르면서 소왕과 효문왕(孝文王)과 장양왕(莊襄王)과 시황(始皇)까지 섬겼다.
진시황을 위해 연(燕)나라에 가 연나라의 태자단(太子丹)이 진나라에 인질로 오도록 했다.
3) 고사성어
(1) 累卵之危(누란지위, 포갤 루(누), 알 란, 어조사 지, 위태할 위)
이 말의 의미는 “쌓아올린 계란의 위험, 조금만 건드려도 와르르 무너져 깨질 위험한 상태”이다.
위나라 범수는 중대부 수가의 부하로 있을 때 수가의 수행원으로 제나라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범수는 억울한 누명으로 수가의 미움을 사서 죽을 처지에 있었다. 마침 위나라를 다녀와 돌아가는 진나라 사신 왕계의 도움으로 장록으로 이름을 바꿔 진나라로 망명을 하게 되었다.
이때 왕계가 진왕에게 “위나라 장록 선생이란 사람은 천하에 뛰어난 변사입니다.
그는 진나라는 지금 계란을 쌓아 놓은 것보다 정세가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자기를 받아들인다면 진나라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불행히도 이런 내용을 알릴 길이 없다기에 신이 모시고 왔습니다.(秦王之國 危於累卵 得臣則安 然不可以書傳也 臣故載來)”
이렇게 하여 범수는 진왕에게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대외정책을 진언하는 등 크게 활약하고 공헌을 세우게 되었다.
(2) 항룡유회(亢龍有悔)
이 말의 뜻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다”는 뜻으로, 극히 존귀한 지위에 올라간 자가 조심하고 겸퇴(謙退)할 줄 모르면 반드시 패가망신하게 됨을 비유한 말이다.
채택이 진(秦)나라 재상 범수를 만나 “재상의 인을 내놓고 여생을 편히 살라고 설득하면서 한 말”이다.
채택은 공을 세웠으나 비명에 간 상앙, 백기, 오기, 문종 등 네 사람의 예를 들면서, 지금 재상의 자리를 내 놓으면 왕자교(王子喬) 적송자(赤松子) 처럼 오래 살 것이며 범려처럼 도주공이 되어 만인의 추앙을 받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반드시 후회할 때가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고, 펴기만 하고 굽힐 줄 모르며, 가기만 하고 돌아올 줄을 모르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亢龍有悔; 此言上而不能下, 信而不能, 往而不能自返者也)
(참고)
주역(周易)의 건괘(乾掛)는 용(龍)이 승천하는 기세를 단계별로 용(龍)에 비유하고 있다. 《주역》건괘 맨 위에 있는 육효(六爻)의 효사(爻辭)에 있는 말이다. 주역의 64개의 괘는 각각 여섯개의 효로 되어 있는데 괘 전체에 대한 괘사가 있고, 각 효마다 효사가 있다.
건괘의 여섯 개 효 중 맨 아래 있는 효를 초구(初九), 곧 초효(初爻)라고 하는데, 양기 중에서도 맨 아래 있는 것은 아직 땅 속에 묻혀 있어 얼음이 풀릴 시기를 기다려야 움직이게 된다.
첫째 효는 용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고 그 뜻인 효사(爻辭)는 잠룡물용(潛龍勿用)이다.
곧 연못 깊이 잠복해 있는 용,잠용(潛龍)은 덕(德)을 쌓으면서 때를 기다린다.
둘째 효는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 것이 유리하다(見龍在田 利見大人)"라고 되어 있다.
즉 땅위로 올라와 자신을 드러내는 용,견용(見龍)이 되면 비로소 덕 (德)을 만천하에 펴 훌륭한 군주(君主)의 신임을 받게 된다. (항상 언행을 삼가고 악을 멀리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선행을 해도 자랑하지 않고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해석된다.)
셋째 효는 "군자는 종일 쉬지 않고 노력하고 저녁에 삼가면 위태로우나 허물은 없다 (君子終日乾乾 夕 苦 无咎)"로 되어 있다. 덕을 기르고 사업을 보전하기 위해 군자는 바른 말과 참된 마음을 기른다는 뜻이다.
네째 효는 "연못에서 혹 뛰어놀기도 한다. 허물이 없을 것이다 (或躍在淵 无咎)" 이다.
용이 마침내 날기 시작하려 할 때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해서 그 행동은 일정함이 없으나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니고 제멋대로 방자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항상 때와 장소에 맞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허물을 면할 수 있다고 한다.
다섯 째 효는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만나는 것이 이롭다 (飛龍在天 利見大人)"로 되어 있다.
날아오르는 용이 하늘에 도달하니 건괘의 극치이다.
성인이 나타나 만인의 찬양을 받는다고 해석된다. 점복에서 이 괘가 나오면 마음대로 활동해도 좋다고 한다.
비룡(飛龍)은 본 괘(掛)의 극치로서 제왕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훌륭한 덕(德)을 갖추었으므로 훌륭한 신하가 구름처럼 몰려들어 보필한다.
맨 위에 있는 마지막 상구(上九)의 효사가 "높이 오른 용이니 후회가 있을 것이다(亢龍有悔)"이다.
끝까지 날아 오른 용은 내려올 일밖에 남아 있지 않다.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민심을 잃고, 현인을 낮은 지위에 두기 때문에 그 보좌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해도 뉘우칠 일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절정의 경지에 이른 용(龍)이 바료 항룡(亢龍)이다.
승천(昇天)한 용 (龍)인 셈이다.
하지만 물극즉반(物極則反-만물이 극(極)에 차면 기우는 법), 달도 차면 기운다고 하지 않았는가.
'항룡(亢龍)'에 대한 공자(孔子)의 해석은 시사(示唆)하는 바가 크다.
곧 너무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존귀하나 지위가 없고, 너무 교만하여 민심을 잃게 되며, 남을 무시하므로 보필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항룡(亢龍) 에 이르면 후회(後悔)하기 십상이니 이것이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것이다.
따라서 만월보다는 열 나흘 달이 좋고, 활짝 핀 꽃보다는 몽우리일 때가 더 가치있으며, 완전 중앙이 아닌 미앙궁(未央宮)이 더 여유가 있다.
역사서에서 '항룡'이란 말이 사용된 용례는 사기 외에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의 찬(贊)에 보이는 정도이다. … 항룡은 기운이 끊겨 비명에 죽을 운명이다(亢龍絶氣 非命之運)"라고 되어 있다.
(3) 성공자퇴(成功者退, 이룰 성, 공 공, 놈 자, 물러날 퇴)
이 말의 뜻은 “사람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일단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다음 오는 것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가버린다”이다.결국 “공을 이룬 사람은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 성공자퇴(成功者退)이다.
보다 구체적인 말이 공성자퇴(攻城身退)다. 그러나 이 말의 원 말은 성공자거(成功者去)이다.
사람만이 아니고 모든 사물은 “일단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다음 오는 것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고 가버린다”는 뜻이다. 죄인의 몸으로 피해 숨어 있다가 하루아침에 진나라 승상이 된 범수도 차츰 실수를 저지르게 되어 진소왕(秦昭王)의 신임이 날로 엷어져 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채택이 그의 뒤를 물려받을 생각으로 진나라로 향하게 된다. 그는 진나라에 도달하기 전 도중에 도둑을 만나 가지고 있던 여행 도구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다. 함양에 도착한 채문은 소문을 퍼뜨려 범수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연나라 사람 채택은 천하의 호걸이요 변사다. 그가 한번 진왕을 뵙게 되면 왕은 재상의 자를 앗아 채택에게 주게 될 것이다.”범수는 채택을 불러들여 불쾌한 태도로 물었다. "당신이 날 대신해서 진나라 승상이 된다고 했다는데, 그게 사실이오?""그렇습니다.""어디 그 이야기를 한번 들어 봅시다."이리하여 채택은,
"어쩌면 그렇게도 보는 것이 더디십니까. 대저 사시(四時)의 순서는 공을 이룬 것은 가는 법입니다." 하고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 마침내 범수를 설득시켜 그로 하여금 그 자리를 물러나야 되겠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이리하여 범수의 추천으로 진나라의 재상이 된 채택은 몇 달이 다 가지 않아 그를 모략하는 사람이 있자, 자기가 범수에게 권했듯이 곧 병을 핑계로 자리를 내놓는다.
그리하여 진나라에서 편안히 여생을 보내며, 가끔 사신으로 외국에 다녀오곤 했다.
(4) 월만즉휴(月滿則虧)
이 말은 “달도 차면 기운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성하면 쇠퇴하게 된다”는 의미다. 범수는 위나라 사람이고 채택은 연나라 사람으로 모두 고향에서 불우하게 살다가 진나라에 들어와 재상이 되어 출세한 인물들이다. 범수는 진나라 소왕을 도와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세웠고, 양후의 권한을 빼았았다. 채택은 ‘공을 세운 후에는 물러나는 것이 최상의 도’라고 재상인 범수를 설득하여 물러나게 한 후 재상이 되었다.
후에 그도 스스로 물러나 평안한 말년을 보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월만즉휴(月滿則虧)의 유명한 말을 남겼다.
(5) 탁발막수(擢髮莫數)
이 말은 《사기(史記)》의 〈범수채택열전(范雎蔡澤列傳)〉에 실려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탁발난수(擢髮難數)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죄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전국시대에 위(魏)나라의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는 범수(范睢)를 수행원으로 대동하여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제양왕(齊襄王)은 수가는 홀대하고, 범수의 달변과 학식을 높이 평가하여 극진하게 예우하고 별도로 예물도 하사했다.
이를 알게 된 수가가 분개하여 귀국한 뒤에 재상인 위제(魏齊)에게 범수가 제나라와 밀통하여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고 모함했다.
위제는 범수를 체포하여 혹독하게 고문했다.
범수가 매질로 이빨이 모두 빠지고 뼈마디가 모두 부러져 견디지 못하고 늘어지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변소에 버리게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범수는 기지를 발휘하여 자기를 지키는 사람을 매수하여 간신히 살아나 진(秦)나라로 도망쳤다.
범수는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고 진소양에게 유세하여 재상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얼마 후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위나라는 수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화친을 교섭하도록 하였다.
수가가 위나라의 사신으로 진나라에 들어온 것을 알게 된 범수는 남루한 하인의 행색으로 가장하여 그를 만났다.
수가는 남루한 옷차림의 범수를 동정하며 솜옷을 한 벌 주고는, 재상 장록과 친한 사람이라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범수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과 잘 아는 사이라고 하면서 접견을 주선해 보겠다고 했다.
범수는 수가와 함께 재상의 관청에 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이 지나도 범수가 나오지 않자 수가는 문지기에게 물어보고 나서야 범수가 바로 장록임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범수가 나타나자 수가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범수가 "너의 죄가 얼마나 되겠느냐"라고 묻자, 수가는 "제 머리털을 모두 뽑아 헤아려도 이 수가의 죄는 많아서 속죄하기에는 부족합니다.(擢賈之髮, 以續賈之罪, 尙未足)"라고 대답했다.
이에 범수는 수가는 제포지연(綈袍戀戀)의 정이 있다고 생각해서 수가의 목숨은 살려 주면서 위나라에 돌아가 위제의 목을 보내라고 했다.
위제는 결국 자살하고 그의 목은 범수에게 보내졌다.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
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사마천의 사기시리즈 제1권)(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 총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