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반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1권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1권

지은이 : 고종문
출간일 : 2015-05-22
판매가 : 8,000원
포멧 : ePub
판매서점

책소개

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사기시리즈 제1권>에서는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본기 및 세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특히, 사마천과 사기를 자세히 알기 위해 각권 공히“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부분을 첨가하였다.

사기시리즈 제2권(사기열전 제1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편 백이열전부터 제18편 춘신군열전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3권(사기열전 제2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9편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부터 제33편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4권(사기열전 제3권)에서는 제34편 전담열전(田儋列傳)부터 제53편 남월열전(南越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5권(사기열전 제4편)에서는 제54편 동월열전(東越列傳)부터 제70편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를 다룬 후, 마지막으로 사마천의 편지인 보임안서를 싣는다.(원래 보임안서는 사기에는 없고 반고의 한서에 실려 있다.)

목차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1권>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 및 역사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배경

1)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건국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기열전

1. 백이열전(伯夷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백이(伯夷)와 숙제(叔齊)
3) 고사성어 소개
(1)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2) 거세혼탁 청사내현(擧世混濁 淸士乃見)
4) 백이열전(伯夷列傳)전문

2. 관안열전(管晏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관중(管仲)
(2) 안영(晏嬰)
3) 고사성어
(1) 관포지교(管鮑之交)
(2) 안자이어(晏子之御)
4) 관안열전(管晏列傳)전문

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노자
(2) 신불해(申不害)
(3) 장자(莊子)
(4) 한비자(韓非子)
3) 고사성어
(1) 양고심장(良賈深藏)
(2) 식여도(食餘挑)
4)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전문

4.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사마양저(司馬穰苴)
3) 고사성어
(1) 인미언경(人微言輕)
4)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전문

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손무(孫武)
(2) 손빈(孫臏)
(3) 오기(吳起)
3) 고사성어
(1) 즉삼령오신지(卽三令五申之)
(2) 연저지인(吮疽之仁)
(3) 와신상담(臥薪嘗膽)
4)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전문

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오자서(伍子胥)
3) 고사성어
(1) 일모도원(日暮途遠)
4)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전문

7. 중니제자열전(中尼弟子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공자(孔子)
3) 고사성어
(1) 이모취인(以貌取人)
(2) 서하지통(西河之痛)
(3) 단표누항(簞瓢陋巷)
4) 중니제자열전(中尼弟子列傳)전문

8. 상군열전(商君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상앙(商鞅)
3) 고사성어
(1) 이목지신(移木之信)
(2) 상앙지법(商鞅之法)
4) 상군열전(商君列傳)전문

9.- 10. 소진장의열전(소진열전(蘇秦列傳), 장의열전(張儀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소진(蘇秦)
(2) 장의(張儀)
(3) 귀곡자(鬼谷子)
(4) 귀곡선생의 제자 소진과 장의
3) 고사성어
(1) 합종 – 소진(蘇秦)
(2) 연횡 - 장의(張儀)
(3) 계구우후(鷄口牛後)
(4) 전거후공(前倨後恭)
(5) 고침안면(高枕安眠)
(6) 일거양득(一擧兩得)
4) 소진열전(蘇秦列傳)과 장의열전(張儀列傳)전문

11.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저리자(樗里子)
(2) 감무(甘茂)
3) 고사성어
(1) 삼인성호(三人成虎)
(2) 증삼살인(曾參殺人)
4)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전문

12. 양후열전(穰侯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양후(穰侯)
3) 고사성어(생략)
4) 양후열전(穰侯列傳)전문

13. 백기왕전열전(白起王煎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백기(白起)
(2) 왕전(王煎)
3) 고사성어(생략)
4) 백기왕전열전(白起王煎列傳)전문
1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맹자(孟子)
(2) 순자(荀子)
(3) 추연(鄒衍)
3) 고사성어
(1) 견백동이(堅白同異)
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전문

1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맹상군(孟嘗君)
3) 고사성어
(1) 교토삼굴(狡兎三窟)
(2) 계명구도(鷄鳴狗盜)
(3) 목경지환(木梗之患)
4) 문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전문

1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평원군 조승(趙勝)
(2) 우경(虞卿)
3) 고사성어
(1) 이련지혼(利令智昏)
(2) 낭중지추, 모수자천(囊中之錐, 毛遂自薦)
4)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전문

1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신릉군(信陵君)
3) 고사성어
(1) 인거매장(引車賣漿) 
(2) 절부구조(竊符救趙)
4)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전문

18.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춘신군(春申君)
3) 고사성어(생략)
4)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전문

<참고자료>

책리뷰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ly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그림 Historia와 헤로도투스(출처: 구글)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 ‘사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그림 사마천의 초상화(출처: 구글)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아래에서 시기별로 나눠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사마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동상(구글)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마는 성이고 이름은 천이다.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부여받는 이름으로, 관명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이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 정도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으로 천문과 달력, 그리고 고전도 능하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마천이 7세 때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은 용문의 산간벽지에서 소를 치는 등 목축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천은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 사마담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듯이, 사마담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고전을 읽었고, 특히 역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4살 때부터 사마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10대 무렵에는 고문서를 읽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다양한 인재들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선조들은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30여년간 한무제 밑에서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했다.
사관이란 원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관이라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은 상태로, 오직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서의 편찬을 계획했다.
사마담은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이 13세(133년)무렵부터 고향에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와 위수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장답사를 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자질과 지식을 쌓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마담은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현명한 임금과 충신과 의사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마천은 20세(126년)경, 사마천은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여행하기 시작했다.
약 2-3년간의 여행이었으나, 훗날 사기 집필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마천은 이후 낭중(郎中), 즉 황제의 비서관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몸소 체험하고 터득했다.
그 즈음,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하늘과 땅에 드리는 봉선제를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도 당연히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사마담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된다.
사마담은 탄식하며 낙담하여 결국은 화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이 사건...
참고로 봉선이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이다.
봉선(封禪)은 제후들이 선(禪)을 통하여 천자(天子)로 부터 봉작(封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봉작(封爵)은 천자(天子)가 제후들에게 봉선제(封禪祭)를 열고 각 제후들은 태산의 원구단(圓丘壇)에 모여 선(禪)을 행한 뒤 그 평가가 내려지고 선통(禪統)의 깊고 낮음에 따라 천자(天子)가 작위와 땅을 봉(封)해 주는 것을 봉작(封爵)이라고 한다.

제왕운기에 봉선(封禪)에 대한 기록이 있다.

“평생을 통해서라도 도(道)를 열지 않으면 안 되며 오행(五行)을 암송하고 외우면서 반드시 선(禪)을 통해야 군주가 될 수 있다.”

봉선의 전통은 상고시대에서 부터 한나라때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 규칙과 예법은 예기(禮記)와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에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봉선(封禪)은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이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누구나 이 행사를 거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 태산에서 봉선제를 주관하는 광경(출처: 구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강력하지 않은 이상 봉선제를 하긴 힘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태평성대를 누렸던 황제, 통치기간 중 길한 조짐이 나타난 황제들만 이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따라서, 진시황제, 한 무제, 광무제, 당 고종, 현종, 송 진종, 휘종, 원의 쿠빌라이, 청 강희제, 건륭제 등 역대 중국 통일 왕조 기간 중에도 최고의 황권을 지닌 전성기의 왕들만이 이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봉선제의 상징성이 이토록 중요하고 대단할진대, 사마담은 당연히 이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다.
행사는 황노사상(황제숭배와 노장사상의 결합)에 기반한 행사였다.
처음으로 이 행사를 황제가 불로장생을 얻었다는 설화가 내려오자, 후대 황제들은 당연히 이 행사를 주관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행사를 치를 때에는 한 치의 문제라도 있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이 의식의 세부적인 사항을 모른 체 행하려 하자 유생들은 그 의식의 형식과 절차를 제대로 모른다면서 극구 반대했던 적이 있다.
이는 결국 진시황의 노여움을 사 나중에 분서갱유로 이어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진시황은 봉선제를 중국의 오악 중 제일이라는 태산에서 거행했다.
진시황은 시안에서 태산까지 1500Km에 달하는 먼 거리를 가마를 타고 이동했다. 당시로는 몇 개월 이상 걸리는 일이었다.
진시황이 봉선제를 끝내고 내려올 즈음, 비가 내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그의 봉선제를 비웃었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진시황제가 이 행사를 끝내고 내려올 즈음, 벼락을 대신 맞은 나무에게 오대부라는 벼슬을 수여했다고도 전해진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

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그림 대나무로 만든 죽간, 나무로 만든 목간(출처: 구글)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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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2. 왜 사기인가?

왜 사마천의 사기인가?
사기는 중국고대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3천 여년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 사실기록이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고증과 기행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 - 즉 기전체를 창안했다.
중국의 역사는 국가에서 관장하는데, 이후의 24정사 모두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가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는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중국의 불타 없어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기는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가미된 감정을 이입시킨다. 결국 문사철이 가미된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기니긴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의 메아리를 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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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절대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꼿꼿한 표상’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사마천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켜 역사상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위를 주는 것은 물론 지주가 되고 있다.
보통 역사는 승자편이라고들 한다.
또한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예외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되새기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보편적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진섭같은 머슴도 제후의 반열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보통사람들도 사기를 읽고 동일시하면서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곤 했다.
사기를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太史公曰:餘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역술(述歷)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사기> 태사공자서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5파트로 구성된 기전체 역사서이다.
본기는 황제에 관한 기록이다.
표는 연표, 서는 국가 제도와 문물에 관한 전문적 논문, 세가는 황제를 보필했던 제후에 관한 기록이다.
열전은 사기의 백미로 모든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열전 70권 가운데 맨 마지막은 태사공자서로 사마천 자신의 가계와 사기의 나머지 129권에 대한 요약이 주된 내용이다.

사기의 특징을 살펴보자.
① 인물중심의 역사서술 체제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생활과 정치사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자 하였다.
② 인류사회의 역사를 신(神, 天)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의 역사임을 주지하고 인간의 역할을 중시했다.
③ 역사의 변화나 인간사의 성패를 당시의 신학사관에서 벗어나 그 원인을 사회구조, 특히 경제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사마천의 사기저술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1) 구천인지제(究天人之除) :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2)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찰한다.
3) 술왕사지래자(述往事知來者) :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을 알게 한다.
4)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 : 일가의 문장을 이룬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문화적 사상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관과 입장을 완성한다.

특히, 그는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에서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에는 다음 세 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 선구적인고 창의적인 능력가로서 학설을 이루어냈다.
둘째, 백가 중 일가(一家), 사가(史家)로서의 학업을 성취했다.
셋째, 사가가 이룬 학업은 종합적이다.

이런 세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은 사기의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한 결정체적 성어라고 할 수 있다.

사기는 재미는 물론 진한 감동까지 느껴진다.

그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출처: 구글)

작은 이익에 흔들려 친구를 쉽게 배신하고,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오늘날의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신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예양과 형가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려주는 진퇴의 지혜가 있다.
어디 이뿐이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부당하게 핍박당하거나 희생당한 뒤 발분하여 통쾌하게 복수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 별별 인간 군상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시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자세이다.
‘열심히 돈 벌어 부자 되세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 등의 실용적인 직업관, 윤리관이 담겨있다.
세태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틔울만한 풍자가 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를 지켜보면 그 고상함과 지혜에서 오늘날의 코메디를 능가한다.

돈과 관련된 화식열전의 한 구절을 보자.

"보통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의 부자에 대해서는 욕을 하고, 백 배가 되면 무서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 일을 해 주고, 만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그야말로 2천년전이나 오늘날이나 세태가 같은 것을 보면, 한구절, 한구절이 인간들의 군상을 담은 역사의 축소판이며, 그야말로 명언 중 명언이다.
제3편 사기열전

1. 백이열전(伯夷列傳)

1) 개관

당시 고죽국(孤竹國)의 두 왕자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서로 왕위를 사양하며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본래 동생인 숙제를 더 신임하여 공의 지위를 물려주려했다.
보통 형제간 서열의 명칭은 백중숙계(伯-仲-叔-季)의 순서에 따라 매겨진다.
즉 백이는 맏아들, 숙제는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마땅히 맏아들인 백이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며 사양하였다.
하지만 형 백이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숙제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면서 사양했다.
결국 백이와 숙제는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려고 궁을 나가버렸다.
후에 고죽국의 왕위는 하는 수 없이 둘째가 이어받았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였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부귀를 다투지 않고 서로 양보한 '현인(賢人)' 또는 '군자(君子)'라고 여기며 존경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난 후, 먼저 주왕(紂王)에게로 갔다가 실망하고는‘듣자하니 서백이 노인들을 공경하고 잘 모신다는 말이 있는지라’서백후 문왕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도읍에 도착해 보니, 서백후 문왕(文王)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통치했다.
무왕은 상나라 주왕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침내 출병할 때 곁에 있던 모든 사람이 참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절하며 말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위패를 모시고 전쟁을 일으킴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며, 신하된 자로서 천자를 시해하려는 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仁)도 의(義)도 아닙니다.”

군사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 하자 곁에 있던 사상보 강태공이 만류하여 두 사람은 목숨을 건졌다.
곧 은이 멸망하고 희발이 새 나라의 천자가 되자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不事二君)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생을 연명했다.
그때 새 나라의 관리가 된 왕지창이란 사람이 고죽국을 지나다가 그들을 떠올리며 힐난했다.

“주나라의 녹을 먹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지금 주의 땅에서 난 고사리로 연명하는 것은 옳은가.”

백이숙제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다시 뉘우쳐 고사리조차 먹기를 거부하다가 그대로 굶어죽었다고 한다.

백이와 숙제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바꾸었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 농(神農) 우(虞)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 버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결국, 백이와 숙제는 고사리를 캐먹는 것도 중단한 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백이와 숙제가 이렇게 굶어 죽은 일을 두고 사마천은「백이열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의인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중국 문화권의 문헌에서 여러 차례 언급되며, 후대에 충절의 상징이 되었다.
사마천은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으면서’부른 시를 인용한다.
즉 백이와 숙제가 인(仁)을 이룬 사람들로서 세상에 원망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 공자의 말에 반문을 제기한 것이다.
공자는 사마천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이런 시를 지어 불렀는데도 사마천은 세상에 원망이 없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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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하늘을 향하여 절규한다.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하늘의 도가 맞는 것인가? 아니면 틀리는 것인가?”
“역사상의 인물의 생애를 보건대 반드시 천도에 부합된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司馬遷(사마천)은 ≪史記(사기)≫에서 하늘을 원망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어진 이로 이름난 伯夷(백이) 叔齊(숙제)는 굶어 죽었고, 공자의 제자 중 으뜸인 顔回(안회)는 극빈 속에서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러나 대악당 도척은 매일 죄 없는 백성을 죽여 그 살로 膾(회)를 치고 脯(포)를 세상에는 선을 행하여 화를 얻고 악을 행하여 복을 얻는 일이 있는데 그래도‘天道無親(천도무친) 天道不道(천도부도)’라는 말을 믿어야 하는가?”

결국 공자(孔子)는 백이와 숙제는 원한이 없었다고 하였는데 사마천은“과연 그들이 죽어가면서 하늘에 대한 원망을 표하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을 제시하여 공자의 견해에 회의적 반응을 보인다.

즉, 공자는 “백이와 숙제는 과거의 원한을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했으며, 또 “그들은 仁을 구하여 그것을 얻었는데, 또 무엇을 원망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는 결국 사마천 자신이 받았던 무고한 형벌, 즉 궁형에 처해진 자신의 기구한 삶, 운명을 간접적으로나마 하늘에 원망하고 있다.
사마천은 그러면서“부기미(附驥尾)”를 언급한다.
이 뜻은‘파리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駿馬(준마)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를 갈 수 있다’는 말로‘훌륭한 인물에 붙좇아 그 덕분에 출세하거나 일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결국 사마천 자신도 사기라는 인류에 길이 남는 통사를 써서 길이길이 역사에 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저자소개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
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사마천의 사기시리즈 제1권)(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 총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