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반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세가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세가

지은이 : 고종문
출간일 : 2015-06-26
판매가 : 8,000원
포멧 : ePub
판매서점

책소개

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세가>와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각각 사마천의 사기 본기와 세가, 그리고 열전 속의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특히, 각권에서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를 첨부하였다.

목차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관, 역사관 그리고 세계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 배경
1) 시대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본기

1. 오제본기(五帝本紀)
1) 고복격양(鼓腹擊壤)

2. 하본기(夏本紀)
1) 회계(會計)

3. 은본기(殷本紀)
1) 주지육림(酒池肉林)

4. 주본기(周本紀)
1) 백발백중(百發百中)

5. 진본기(秦本紀)
1) 가도멸괵(假道滅虢) 2) 원입골수(怨入骨髓)

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1) 분서갱유(焚書坑儒) 2) 지록위마(指鹿爲馬)

7·8) 항우본기(項羽本紀)와 고조본기(高祖本紀)
1) 약법삼장(約法三章) 2) 금의야행, 금의환향(錦衣夜行, 錦衣還鄕)
3) 경국지색(傾國之色) 4) 삼변초가(四面楚歌) 5) 두발상지頭髮上指)
6) 목지진열(目眥盡裂) 7) 호랑지심(虎狼之心) 8) 파부침주(破釜沈舟)
9) 패왕별희(覇王別姬) 10) 일패도지)(一敗塗地)

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1) 인간돼지(人彘)

10. 효문본기(孝文本紀)

11. 효경본기(孝景本紀)

12. 효무본기(孝武本紀)

제4편 세가

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1) 계찰괘검(季札掛劍) 2) 어복장검(魚腹藏劍)

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1)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1) 일반삼토 일목삼착 (一飯三吐 一沐三捉)

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1) 감당애(甘棠愛)

5. 관채세가(管蔡世家)
1) 시간(屍諫)

6. 진기세가(陳杞世家)
1) 기우(杞憂)

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1) 오복육극(五福六極)

9. 진세가(晋世家)
1) 할고봉군(割股奉君) 2) 퇴피삼사(退避三舍) 3) 탐천지공(貪天之功)
4) 족하(足下)

10. 초세가(楚世家)
1) 삼년불비 우불명(三年不飛又不鳴) 2) 사족(蛇足)

1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 와신상담(臥薪嘗膽) 2) 장경오훼(長勁烏喙) 3) 비조진양궁장, 교토사 주구팽(飛鳥盡良弓藏, 狡兎死走狗烹)

12. 정세가(鄭世家)
1) 중구난방(衆口難防)

13. 조세가(趙世家)
1) 평범한 사람은 세상풍속과 어울리지만, 현명한 사람은 변혁과 함께 한다.
2) 이서어자부진마지정, 이고제제금자부달사지변(以書御者不盡馬之情, 以古帝制今者不達事之變)
3) 순법지공 부족이고세, 법고지학 부족이제금(徇法之功 不足以高世, 法古之學 不足以制今)
4) 호복기사(胡服騎射)

14. 위세가(魏世家)
1) 가빈사양처 국난사양상(家貧思良妻 國亂思良相) 2) 포신구화(抱薪救火)

15. 한세가(韓世家)
1) 시굴거영(時屈擧贏)

1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 득전자전창(得全者全昌) 실전자전망(失全者全亡) 2) 송야백야(松耶柏耶), 주건공자객야(住建共者客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1) 상가지구(喪家之狗) 2) 야합(野合) 3) 위편삼절 韋編三絶

18) 진섭세가(陳涉世家)
1) 연작안지홍곡지지재(燕雀安知鴻鵠之志哉) 2) 맹구주산(猛狗酒酸)
3) 과섭위왕(夥涉爲王) 4) 석권천하(席卷天下) 5) 참목위병 게간위기(斬木爲兵揭竿而旗) 6) 심모원려(深謀遠慮)

19. 외척세가(外戚世家)

20.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1) 나라가 장차 흥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나타타고 군자는 등용되고 소인배는 배척당한다.

21. 형연세가(荊燕世家)

22.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1) 당단부단 반수기란(當斷不斷 反受其亂)

2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1) 발종지시(發踪指示) 2) 상서검리상성신(尙書劍履上星辰) 3) 견마지로(犬馬之勞)

24. 평양후조참세가(平陽侯曹參世家)
1) 조참을 칭송하는 시

25. 유후세가(留侯世家)
1) 우익이성(羽翼已成) 2) 백구과극(白駒過隙) 3) 양약고구(良藥苦口)

26. 진승상평세가(陳丞相平世家)
1) 한류협배(汗流浹背)

27)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1) 독배(牘背)

28.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29. 오종세가(五宗世家)

30. 삼왕세가(三王世家)
1) 고금통의(古今通義)

책리뷰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그림 Historia와 헤로도투스(출처: 구글)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사기’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그림 사마천의 초상화(출처: 구글)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①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② 38세,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③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④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아래에서 시기별로 나눠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사마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동상(구글)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마는 성이고 이름은 천이다.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부여받는 이름으로, 관명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이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 정도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으로 천문과 달력, 그리고 고전도 능하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마천이 7세 때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은 용문의 산간벽지에서 소를 치는 등 목축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천은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 사마담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듯이, 사마담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고전을 읽었고, 특히 역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4살 때부터 사마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10대 무렵에는 고문서를 읽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다양한 인재들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선조들은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30여년간 한무제 밑에서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했다.
사관이란 원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관이라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은 상태로 오직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서의 편찬을 계획했다.
사마담은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이 13세(133년)무렵부터 고향에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와 위수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장답사를 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자질과 지식을 쌓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마담은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현명한 임금과 충신과 의사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마천은 20세(126년)경, 사마천은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여행하기 시작했다.
약 2-3년간의 여행이었으나, 훗날 사기 집필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마천은 이후 낭중(郎中), 즉 황제의 비서관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몸소 체험하고 터득했다.
그 즈음,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하늘과 땅에 드리는 봉선제를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도 당연히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사마담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된다.
사마담은 탄식하며 낙담하여 결국은 화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이 사건...
참고로 봉선이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이다.
봉선(封禪)은 제후들이 선(禪)을 통하여 천자(天子)로 부터 봉작(封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봉작(封爵)은 천자(天子)가 제후들에게 봉선제(封禪祭)를 열고 각 제후들은 태산의 원구단(圓丘壇)에 모여 선(禪)을 행한 뒤 그 평가가 내려지고 선통(禪統)의 깊고 낮음에 따라 천자(天子)가 작위와 땅을 봉(封)해 주는 것을 봉작(封爵)이라고 한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그림 대나무로 만든 죽간, 나무로 만든 목간(출처: 구글)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제3편

본기(本紀)

1. 오제본기(五帝本紀)
2. 하본기(夏本紀)
3. 본기(殷本紀)
4. 주본기(周本紀)
5. 진본기(秦本紀)
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7. 항우본기(項羽本紀)
8. 고조본기(高祖本紀)
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10. 효문본기(孝文本紀)
11. 효경본기(孝景本紀)
12. 효무본기(孝武本紀)













1. 오제본기(五帝本紀)

사기 본기는 총 12편으로 왕(王)들의 연대기이다.
중국 역사 초의 5제(五帝)에서 한(漢) 무제(武帝)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오제본기(五帝本紀)는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에 대한 기록이다.
사마천은 「오제본기」에서 그들을 군주이면서 성인의 모습을 묘사한다.
위대한 개인들에 의해 인간세계의 중심이 창조된다.

그림 중국의 삼황오제

오제본기는 황제(黃帝)로 부터 기술을 시작한다.
전설속의 황제는 한국의 단군과 비슷한 존재이다.
황제(黃帝)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하나이다.
삼황오제(三皇五帝)와 관련된 전설은 여러 계통이 있으며 민간 전승이나 문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신농(神農), 복희(伏羲), 여와(女媧)를 삼황(三皇)으로, 황제(黃帝)·전욱(顓頊)·제곡(帝嚳)·요(堯)·순(舜)을 오제(五帝)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황제는 중국 원시시대 한 부락의 수령이자 중화민족의 선조로 남다른 군사 통솔력과 비범한 통치모략을 지닌 말 그대로 지혜와 용기, 문과 무를 두루 갖춘 모략의 시조라 할 만하다.

1) 고복격양(鼓腹擊壤, 고복격양, 두드릴 고, 배 복, 칠 격, 흙덩이 양)

인류의 역사에서 이상향(理想鄕)의 세계에 대한 갈망(渴望)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해 왔다.
도가(道家)의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서양의 유토피아{Utopia}, 종교에서의 극락(極樂)이나 천당(天堂), 홍길동전(洪吉童傳) 등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상향의 세계 등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다.
고복격양(鼓腹擊壤)은 중국 고대 요(堯)임금 시대의 고사로“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리고, 땅바닥을 치면서 박자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는 뜻으로, 함포고복(含飽鼓腹;배불리 먹고 배를 두드림), 격양가(擊壤歌)로도 쓰이며 요순시대(堯舜時代)의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의미한다.

그림 요임금(출처: 구글)


《십팔사략(十八史略)》이나 《서경(書經)》에 [오제(五帝):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황제(黃帝), 요(堯), 순(舜) 또는 황제(黃帝), 전욱, 제곡, 제요(帝堯), 제순(帝舜)] 중의 요(堯)임금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요임금은 천하가 정말로 잘 다스려져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서민들이 살고 있는 거리로 미행(微行;미복잠행, 微服潛行)을 나가게 되었다.
어느 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요임금의 공덕(功德)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백성 위에 계시는 덕(德)의 최고봉이시여, 백성들은 임금님의 교화(敎化)를 잘 따르네.“

하지만 요임금은 그것만으로는 확신하고 만족할 수 없었다.
또 다시 어느 시골 길을 걷고 있었는데, 어느 노인이 나무 그늘에 앉아 배불리 먹었는지 배를 두드리고{고복(鼓腹)}, 땅바닥을 치면서{격양(擊壤)} 박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해 뜨면 나가 일하고, {日出而作(일출이작)}
해지면 들어와 쉬네. {日入而息(일입이식)}
우물 파서 물을 마시고, {鑿井而飮(착정이음)}
농사 지어 밥을 먹네. {農耕而食(농경이식)}
임금의 힘이 어찌 나에게 미치리오!{帝力何有於我乎(제력하유어아호)}“

이 노래를 들은 요임금은 비로소 기쁨의 미소를 띠면서, "이제는 되었구나!"라고 했다.

백성들이 의식주(衣食住)에 근심이 없고 태평(太平)하고 행복한 생활에 만족하기에 정치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임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세상. 바로 이러한 완벽한 이상향(理想鄕)의 세계를 요임금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요임금은 이후 자신의 왕위(王位)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덕(德)으로 이끌 수 있는 신하 순(舜)에게 왕위를 선양(禪讓)했다.
이것이 유가사상(儒家思想)에서 주장하는 이상향의 시대인 요순시대(堯瞬時代)이다.












2. 하본기(夏本紀)

하나라(夏, 기원전 2070년경 - 기원전 1600년경)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상나라 이전 수백 년간 존재했다고 기록되었다.
하나라 당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헌자료는 없다.
이처럼 하나라는 중국의 전설에 나오는 왕조이다.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요임금의 말년, 홍수가 일어나자 우임금(禹)이 치수 사업을 벌여 ‘물을 다스리는 일’에 성공했다.
그 공으로 순임금(舜)이 죽은 후, 제후(諸侯)들이 받들어 왕위에 오르고 하 왕조를 열어 이후 17대에 이어졌다.
하왕조의 시조 우는 오제의 손자 중 한 명으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아 공적을 이루어 크게 인정받았다.
우는 양성을 도성으로 정했다.
우의 성은 사(姒)였지만 왕조 창시 후에 하후(夏后)로 바꾸었다.
우는 즉위 후 여러 세금을 면제하는 한편, 도시를 건설하고 번잡한 제도와 행정을 간략하게 만들었다.
우는 또한 하천 정비는 물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육성하였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9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했고 스스로 솔선수범하였다.

1) 회계(會計, 모일 회, 계산할 계, Accounting)

사마천은 하본기에서 우리가 현재에 쓰고 있는 회계(會計)의 유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자가 하나라의 역사를 바로잡을 때 많은 학자들에게『하소정(夏小正)』을 전수했다(하나라 역서(曆書) 하력(夏曆)으로 음력(陰曆)을 말한다.). 우순(虞舜)과 하우(夏禹) 때부터 공물과 조세제도가 완비되었다. 어떤 사람은 우(禹)임금이 강남(江南)으로 나아가 제후들을 소집하여 공적을 심사하다가 죽어 그곳에 묻혔으므로 그곳의 이름을 회계(會稽)라고 이름 지었다고 했다. 회계(會稽)는 회계(會計)다.”


3. 은본기(殷本紀)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상(商, 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제로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상나라는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는데, 반경왕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었기 때문에 '은나라'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전설상 상 왕조의 시조는 설이다. 설은 유융씨의 딸이자 제곡의 둘째 부인인 간적이 제비의 알을 먹은 후 임신하여 낳았다.
설의 자손은 대대로 하나라를 섬겼다.
설로부터 탕까지의 14대 사이에 8차례 수도를 옮겼다.
설은 우의 치수사업을 도와서 공을 세웠다.
설로부터 13대째의 탕은 현재의 허난 성 상추 시를 수도로 삼았다.
탕은 현인 이윤의 도움을 빌려 하왕 걸을 쓰러뜨리고 제후들에게 추천되어 왕이 되었다.

1) 주지육림(酒池肉林, 술 주, 못 지, 고기 육, 수풀 림)

이 말은 “술은 연못과 같고, 고기는 숲과 같이 많이 있다”는 뜻으로, 질탕하게 마시고 노는 것, 굉장하게 잘 차린 잔치의 형용으로 은나라 주왕과 관련된 고사이다.
상 왕조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즉위 후 달기라는 미녀에게 빠지고 폭정을 실시했다.
주 임금은 자질이 총명하고 말재간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일처리가 신속하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서 맨손으로 맹수와 싸울 정도였다.
지혜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칠 정도였고, 말재주는 자신의 허물을 감출 수 있을 정도였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과시해 천하에 그의 명성을 드높이려고 했으며, 모두가 자기 밑이라 여겼다.
술과 음악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며 여자를 좋아했다.
달기(妲己)를 총애해 달기의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다.

“주왕은 갈수록 음란해졌다. 미자(微子)가 몇 번이나 충고했지만 주왕이 들으려 하지 않자, 그는 태사(太師), 소사(少師)와 상의하고는 마침내 은을 떠났다.”

비간은 계속 간언했다.

“신하는 죽음으로 충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가 성이 나서 말했다.

“성인의 심장에는 구멍이 일곱 개나 있다고 들었다.”

주임금은 비간을 해부해 그 심장을 꺼내보았다.
기자(箕子)는 너무나 두려운 나머지 미친 척해 남의 노비가 되고자 했지만 주는 그를 잡아 가뒀다.
은의 태사와 소사는 제기와 악기를 가지고 주(周)나라로 달아났다.
마침내 주 무왕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정벌했다.
주도 군대를 일으켜 목야(牧野)에서 대항했으나 패했다.
이처럼, 「은본기」에서의 주왕은 이상적인 제왕이 아니다.
그는 쾌락을 즐기면서, 신하들에게 믿음을 주지도 못했다.

17대의 걸왕 때에는 정치가 포악해지고 민심을 잃게 된다.

사마천은 걸왕과 관련하여 왕도정치(王道德治)의 원칙을 위배하고 폭정을 감행할 경우는 반드시 제왕정치의 몰락과 망국을 초래하게 된다는 점을 말한다.

“귀신을 믿는 것을 좋아했으며, 음란한 짓을 일삼았다. 이때부터 夏后氏(하후씨)의 덕망은 쇠퇴해졌고 제후들이 배반하기 시작했다. 桀王(걸왕)은 덕행에 힘쓰지 않고 무력으로 백성들을 해쳤기 때문에 백성들은 견딜 수 없었다. 백성들이 걸왕을 증오하였으니, 하나라의 멸망은 시간문제였다.”


그림 은나라 주왕의 주지육림(출처: 구글)

이처럼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걸왕’과,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은 음탕하고 난잡할뿐더러 사납고 모진 짓을 마음대로 하는 폭정으로 나라를 망쳤던 왕들이다.

제4편

세가(世家)


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5. 관채세가(管蔡世家)
6. 진기세가(陳家)
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9. 진세가(晉世家)
10. 초세가(楚世家)
11.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2. 정세가(鄭世家)
13. 조세가(趙世家)
14. 위세가(魏世家)
15. 한세가(韓世家)
16.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18.진섭세가(陳涉世家)
19.외척세가(外戚世家)
20.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1. 형연세가(荊燕世家)
22. 제도혜왕세가(齊悼惠王世家)
2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4. 조상국세가(曹相國世家)
25. 유후세가(留侯世家)
26.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
27.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28.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29. 오종세가(五宗世家)
30. 삼왕세가(三王世家)

사마천 사기의 세가(世家)는 총 30편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유명 제후들과 한나라의 황족 제후들과 고관들의 기록이다.

이들 국별사(國別史)는 연대를 기준으로 정리한 것으로 주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주나라의 고공단보(古公亶父, 주나라 시조)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림 고공단보(출처: 구글)
장남 오 태백(吳太伯, 오나라의 시조, 주태왕의 장자)과 차남 중옹(仲雍)은 막내동생 계력(季歷, 오태백의 3째 동생)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양보한 후,

장강 남안(長江南岸)의 형산(衡山)으로 가서 정착하여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
나중에 계력은 형인 오태백과 중옹을 중원으로 불러들이고 했지만 오태백과 중옹은 계력의 말을 거절하였고, 온몸에 문신을 새겼다.
당시 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은 이민족의 풍습이니, 스스로 문신을 새긴 것은 중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태백과 중옹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구오(句吳)라 칭하고, 그 뒤에 태백이 사망하자, 아들이 없어서 그 뒤를 중옹이 이어 받았다.
오태백세가는 오나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자손이 없던 태백의 뒤를 이은 중옹부터 구천과 부차까지의 오나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1) 계찰괘검(季札掛劍, 끝 계, 패 찰, 걸 괘, 칼 검)

이는“계찰이 검을 걸어놓다”린 의미로“신의(信義)를 중히 여김”을 비유한 말이다.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계찰은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의 군주를 알현하게 되었다.
서나라의 군주는 계찰의 보검(寶劍)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사신의 자격으로 중원(中原)의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검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서나라에 도착해보니 서나라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무덤가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수행원이 그 이유를 묻자 계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이 칼을 그에게 주려고 결심하였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훗날 계찰은 자신에게 맡겨진 왕위(王位)마저 사양한다.

세가의 맨 첫머리에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를 배치한다.
계력(季歷)의 형인 태백(太伯)은 계력의 아들 문왕(文王)의 출중함을 보고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기 위해 강남으로 도피했다.
주(周)의 천하 통일에 도움을 주었다는 의미에서 첫머리에 배치하는데, 이는 물론
그림 계찰이 보검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서나라 군주의 묘소앞에 서있다.(출처: 구글)

성공한 인물도 중요하나 성공의 기반을 마련해준 인물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2) 어복장검(魚腹藏劍)

이는“자객 전제가 생선의 배 속에 칼을 숨겨 오나라 왕 요를 암살한 것”에서 유래한다.
공자 광의 아버지의 제번(諸樊)은 오의 초대 국왕 수몽(寿夢)의 장자였다.
수몽은 광 이외에 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막내 계찰은 현인으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아버지 수몽도 계찰을 대를 이어 왕으로 정하고 싶어했다.
허나 계찰(季札)은 형을 두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는 것에 원치 않았다.
우선 제번이 왕위를 잇고, 다음이 동생인 여제(余祭), 그리고 마지막에 계찰에 왕위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왕위를 거부하고 도망해 버린다.
자연히 왕위는 결국 여매의 아들인 요(僚)가 계승되게 되었다.

광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계찰이 도망간 다음은 장자의 아들인 자신이 당연히 왕위를 이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광은 자신의 불만을 숨기면서 요를 시중들어 장군으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 때, 초나라의 오자서가 망명해 와 광의 야망을 헤아렸다.
오자서는 자객-암살자 전제(専諸)를 추천했다.
전제는 오왕 요가 생선요리를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생선요리를 잘하는 지방에 찾아가 수년간 생선 요리를 배운다.
그의 요리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수 많은 칭찬을 받았다.
그야말로 생선요리 전문가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느날, 공자 광은 왕이었던 요(僚)를 연회에 초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요를 없애고자 했던 것이다.
요 역시, 이를 짐작하고 친위대를 미리 준비한 다음 갑옷을 세겹으로 입었다.
하지만 전제는 생선에 비수를 감추어 밥상에 올리게 하였고, 생선 뱃속에서 비수를 꺼내 요를 찔렀다.
전제 역시 친위대에 죽게 되었고, 결국 공자 광은 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오나라 왕 합려(闔閭)다.
합려는 결국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에 올라 많은 업적을 남긴다.
합려는 오자서, 손무 등과 같이 초강대국 초나라와 몇 번이나 싸웠다.

그림 오앙 합려(출처: 구글)


기원전 496년, 10년 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 월나라로 쳐들어간다.
그러나 월나라 장군 범려의 책략에 막혀 패배하고 다리에 활까지 맞아 상처가 덧나 죽게 된다.
구천이 부친을 죽였던 것을 잊지 말라고 아들 부차에게 유언하고, 복수를 맹세하게 했다.
역사상 춘추오패의 한 사람으로 꼽기도 한다.
그를 묻은 언덕에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해서, 후치우(虎丘)라고 불렀다.

그림 춘추오패는 좌로부터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가리킨다.(출처: 네이버)

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제나라의 시조는 강태공이다.
제태공세가는 강태공이 분봉 받은 제나라(일명 강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며, 태공 때부터 강공 때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강태공은 지금으로부터 3100여 년 전 사람으로 강태공(姜太公), 태공(太公), 태공망 여상(太公望 呂尙),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 강상(姜尙) 등으로 불린다.
강태공은 성은 강(姜)이며, 이름은 상(尙)이였으나 강족(姜族)으로 전통 동이족(傳統 東夷族) 출신이었던 선조가 呂나라에 봉(封)해짐으로써 봉지(封地)를 따라 성씨를 삼아 여상(呂尙)이라 했다.
태공망(太公望)이란 호칭은 선왕 혹은 윗사람(太公)이 바라고 기다리던(望) 사람이라는 뜻으로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1)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엎어질 복, 물 수, 아닐 불, 돌아올 반, 동이 분)

이는 “엎지른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는 말로 “한번 떠난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일단 저질러진 일은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상(商)나라말기 주왕(紂王)은 연못을 술로 채우고, 고기를 숲처럼 매달아 놓고 즐긴다는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나라를 도탄(塗炭)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에 희발(姬發)이 아버지 희창(姬昌)의 유지를 받들어 강상(姜尙)등의 도움으로 난을 일으켜 주왕(紂王)을 몰아내고 상(商)나라를 무너뜨린 뒤, 주(周)나라를 세웠다.
주(周)나라의 시조인 희발(姬發)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 희창(姬昌)이 문왕(文王)이며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렸다.
서백(西伯)이 하루는 사냥을 나갔다가, 위수(渭水)근처에 이르게 되었는데, 강가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는 초라한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노인을 만나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이 노인의 학식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그를 자신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이 노인이 바로 강상(姜尙)이다.
그의 선조가 여(呂)나라에서 봉하여졌으므로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다.
서백(西伯)이 그를 만났을 때, 서백(西伯)은 자신의 아버지 태공(太公)이 바라던(망(望)) 사람이라 해서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 또는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태공(姜太公)으로 더욱 잘 알려졌다.
본래 강상(姜尙)은 동해의 한 마을에서 가난하게 사는 선비였다.
그가 마씨(馬氏)와 결혼을 했는데 늘 책만 읽고 가정은 돌보지 않아 끼니를 이을 수조차 없을 만큼 가난하였다.
이에 마씨(馬氏)는 집을 나가 버렸고, 강상(姜尙)은 허구헌날 낚시질만 하였던 것이다.

그림 강태공의 낚시질 모습(출처: 구글)

그런 그가 서백(西伯)을 만나 입신출세하여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을 때 집을 나간 마씨(馬氏)가 돌아와서 이제는 밥 굶을 일 없으니 다시 살겠다고 했다.
강상(姜尙)이 마씨(馬氏)에게 물을 길러오라 시키고, 물을 길러오니 다시 마당에 부으라고 하였다.
마당에 물을 부으니 이제는 그것을 다시 동이 주워담으라고 하자 마씨(馬氏)가 땅에 엎질러진 물을 어찌 주워 담을 수 있냐고 따졌다.
이에 강상(姜尙)이 말했다.

"한번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에 담을 수 없고(복수불반분, 覆水不返盆)
한번 나간 아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유래된 말이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 이다.

저자소개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키메이커)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세가(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