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반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3권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3권

지은이 : 고종문
출간일 : 2015-05-22
판매가 : 8,000원
포멧 : ePub
판매서점

책소개

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사기시리즈 제1권>에서는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본기 및 세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특히, 사마천과 사기를 자세히 알기 위해 각권 공히“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부분을 첨가하였다.

사기시리즈 제2권(사기열전 제1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편 백이열전부터 제18편 춘신군열전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3권(사기열전 제2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9편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부터 제33편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4권(사기열전 제3권)에서는 제34편 전담열전(田儋列傳)부터 제53편 남월열전(南越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5권(사기열전 제4편)에서는 제54편 동월열전(東越列傳)부터 제70편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를 다룬 후, 마지막으로 사마천의 편지인 보임안서를 싣는다.(원래 보임안서는 사기에는 없고 반고의 한서에 실려 있다.)

목차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3권>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 및 역사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배경

1)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건국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기열전

34. 전담열전(田儋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전담(田儋)
3) 고사성어(생략)
4) 전담열전(田儋列傳) 전문

35.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번쾌(樊噲)
(2) 역상(酈商)
(3) 등공(滕公)
(4) 관영(灌嬰)
3) 고사성어
(1) 토사구팽(兎死狗烹)
(2) 양두구육(羊頭狗肉)
(3) 견토지쟁(犬兎之爭)
(4) 견원지간(犬猿之間)
(5) 견마지로(犬馬之勞)
4)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전문

3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장창(張蒼)
3) 고사성어
(1) 기기애애(期期艾艾)
(2) 걸해골(乞骸骨)
4)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전문

3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역생(酈生)
(2) 육가(陸賈)
3) 고사성어
(1) 고양구도(高陽舊徒)
(2) 낙백(落魄)
4)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전문

3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부관(傅寬)
(2) 근흡(靳歙)
(3) 주설(周緤)
3) 고사성어(생략)
4)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전문

3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유경(劉敬)
(2) 숙손통(叔孫通)
3) 고사성어(생략)
4)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전문

4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계포(季布)
(2) 난포(欒布)
3) 고사성어
(1) 계포일락(季布一諾)
4)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전문

41.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원앙(袁盎)
(2) 조조(晁錯)
3) 고사성어
(1) 목불교첩(目不交睫)
4)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전문

42.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장석지(張釋之)
(2) 풍당(馮唐)
3) 고사성어
(1) 풍당이로 이광난봉(馮唐易老 李廣難封)
4)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전문

43.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만석군(萬石君)
(2) 위관(衛綰)
(3) 직불의(直不疑)
(4) 장숙(張肅)
3) 고사성어(생략)
4)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전문

44. 전숙열전(田叔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전숙(田叔)
(2) 임안(任安)
3) 고사성어(생략)
4) 전숙열전(田叔列傳) 전문

45.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편작(編鵲)
(2) 창공(倉公)
3) 고사성어
(1) 가도멸괵(假途滅虢)
(2) 휘질기의(諱疾忌醫)
(3) 기사회생(起死回生)
(4) 여섯 가지의 불치병
4)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전문

46.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오왕(吳王) 비(濞)
3) 고사성어
(1) 지강급미(舐糠及米)
4)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전문

4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두영(竇嬰)
(2) 전분(田昐)
3) 고사성어
(1) 한상지만(恨相知晩)
(2) 수서양단(首鼠兩端)
(3) 유언비어(流言蜚語)
4)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전문

4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한안국(韓安國)
3) 고사성어
(1) 사회복연(死灰復燃)
4) 한 장유열전(韓長孺列傳) 전문

4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이광(李廣)
3) 고사성어
(1)도리불언 하자성혜(挑李不言 下自成蹊)
(2) 중석몰촉(中石沒鏃)
4)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전문

50. 흉노열전(匈奴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3) 고사성어(생략)
4) 흉노열전(匈奴列傳) 전문

5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위청(衛靑)
(2) 곽거병(霍去病)
3) 고사성어(생략)
4)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전문

52.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공손홍(公孫弘)
(2) 주보언(主父偃)
3) 고사성어(생략)
4)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전문

53. 남월열전(南越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조타(趙佗)
3) 고사성어(생략)
4) 남월열전(南越列傳) 전문

<참고자료>

책리뷰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ly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그림 Historia와 헤로도투스(출처: 구글)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 ‘사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그림 사마천의 초상화(출처: 구글)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

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그림 대나무로 만든 죽간, 나무로 만든 목간(출처: 구글)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2. 왜 사기인가?

왜 사마천의 사기인가?
사기는 중국고대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3천 여년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 사실기록이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고증과 기행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 - 즉 기전체를 창안했다.
중국의 역사는 국가에서 관장하는데, 이후의 24정사 모두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가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는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중국의 불타 없어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기는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가미된 감정을 이입시킨다. 결국 문사철이 가미된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기니긴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의 메아리를 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절대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꼿꼿한 표상’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사마천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켜 역사상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위를 주는 것은 물론 지주가 되고 있다.
보통 역사는 승자편이라고들 한다.
또한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예외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되새기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보편적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진섭같은 머슴도 제후의 반열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보통사람들도 사기를 읽고 동일시하면서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곤 했다.
사기를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3편 사기열전

34. 전담열전(田儋列傳)

1) 개관

진한교체기 제나라에서 봉기한 전씨들의 행적을 살펴본다.
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의 귀족 출신 전담(田儋)은 진나라 현령을 죽이고 사촌동생들인 전영(田榮)과 전횡(田橫)과 함께 자립하여 제왕이 되었다.(전영과 전횡은 친형제다.)
전담이 진나라 토벌군 대장 장한(章邯)과의 싸움에서 지고 전사하자 제나라 사람들이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왕으로 추대하고 전각(田角)을 재상으로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았다.
전영이 전건을 공격하자 전건은 초나라 망명하고 전각은 조나라로 도망치고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조나라에 들어가 있던 전간은 계속 그곳에 머물렀다.
전건을 제왕의 자리에서 쫓아낸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상국 동생 전횡은 장군으로 삼았다.
진나라를 멸한 항우가 논공행상을 하여 제나라 지역을 삼분하여 다음과 같이 제후왕에 봉했다.
전영이 추대한 전불(田巿)은 교동왕(膠東王)에 봉했다.(치소는 즉묵(卽墨)이다.)
항우를 따라 함양에 입성한 전도(田都)를 제왕(齊王)에 봉했다.(치소는 임치(臨淄)다.)
거록의 싸움 직전 제나라 지역의 군사와 함께 항우의 진영에 참가한 왕건의 손자 전안(田安)을 제북왕(齊北王)에 봉했다.(치소는 박양(博陽)이다.)
이에 전영이 제왕 전도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전불을 계속 제왕의 자리에 있게 했다.
항우의 보복을 두려워한 전불이 임치를 탈출하여 즉묵으로 달아나자 전영이 그 뒤를 추격하여 죽였다.
계속해서 전안마저 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삼제를 통합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전영이 제나라를 토벌하기 위해 촐동한 항우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전사하자 동생 전횡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재상이 되었다.
고조가 보낸 유세객 역생(酈生)에게 설복되어 한나라와 화친하기로 하고 제군의 경계를 풀자 그 틈을 이용한 한신의 기습을 받고 전광은 한군에 의해 사로잡히고 전횡은 달아나 스스로 제왕이 되어 초나라에 구원을 청하여 한나라에 대항했다.
초나라의 구원군 대장 용저와 함께 한신의 한나라 군사와 고밀에서 싸웠으나 패하고 달아나 5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섬으로 들어가 숨었다.

2) 등장인물소개

(1) 전담(田儋, ? ~ 기원전 208년)

그림 전담(출처: 구글)


진(秦)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원래 전담은 옛 제(齊)나라의 적현(狄縣) 사람으로, 유능한 종제 전영(田榮), 전횡(田橫)과 강성한 종족을 거느려 세력을 형성했다.
이세황제(二世皇帝) 원년(기원전 209년), 농민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진나라에 맞서 거병하고 장초를 세우고 진나라의 각 지역을 공격했다.
이세황제 원년 10월(기원전 208년), 옛 위(魏)나라 방면을 공격한 주불(周巿)이 적현을 공격하자, 전담은 계책으로 주불과 맞서 싸우는 현령(縣令)과 접견 자리를 만들어 현령을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라, 적현의 군사를 이끌고 주불의 군사를 몰아내고 동쪽의 제나라 땅도 손에 넣었다.
장초가 장한의 진압군에 여러 차례 지고 진승도 달아나자, 진승의 생사를 모른 장초의 일부 장수들이 이세황제 2년 단월에 경구(景駒)를 초왕으로 옹립했다.
그 다음 달에 경구는 전담에게 사자 공손경(公孫慶)을 보내 함께 진나라를 치자고 청했으나, 왕이 되기 전에 서로 승인받지 않은 점을 가지고 다투다 전담이 공손경을 죽였다.
이세황제 2년 6월, 장한이 위나라 왕 위구를 공격해 임제(臨濟)에서 포위하자 전단은 위나라를 구원하러 출진했으나, 진나라 장군 장한(章邯)에게 패하여 죽었다.

3) 고사성어(생략)

4) 전담열전(田儋列傳) 전문

전담(田儋)은 적현(狄縣) 출신이다.
옛날 제나라 왕족 전씨의 후예다. 전담과 종제 전영(田榮),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은 모두 호걸들로 강대한 종족들의 세력으로 인해 사람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에 장초(張楚) 정권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 된 진섭(陳涉)은 주불(周巿)을 시켜 위나라 땅을 평정하고 북쪽으로 나아가게 했다.
주불이 적현(狄縣)에 이르렀으나 진나라의 적현 수령이 항복하지 않고 굳게 지켰다.
전담이 그의 노복 한 명을 일부러 붙잡아 포승으로 묶은 다음 소년들과 함께 적현의 관아 뜰로 나아가 그의 노복을 죽여야겠다고 하면서 현령의 접견을 청했다.

이윽고 적현의 현령이 밖으로나 나오자 전담이 재빨리 달려들어 그를 살해하고 현의 호족과 관리 및 자제들을 향해 소리쳤다.

"제후들이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자립했다. 제나라는 옛날에 건국한 제후국으로써 이 담은 제나라의 왕족인 전씨임으로 내가 마땅히 제나라의 왕이 되어야하겠다."

이어서 그는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현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주불의 군사를 공격했다.
주불의 군사는 물러가고 전담은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진나라 장수 장한이 위왕 구(咎)를 임제(臨濟)에서 포위하여 급공을 가했다.
위왕이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전담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전했다.
장한이 밤중에 군사들에게 함매(銜枚)를 물려 기습하여 제와 위 연합군을 대파하고 전담을 임제에서 살해했다.
전담의 동생 전영이 잔병을 수습하여 동아(東阿)로 달아났다.
제왕 전담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제나라 사람들은 그 즉시 옛날 제왕 왕건(王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찾아 왕으로, 전각(田角)을 상국으로, 전간(田間)을 대장으로 삼아 제후들의 군사에 대항했다.
동아로 달아난 전영을 장한이 그 뒤를 추격하여 포위했다.
전영이 위급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항량은 곧바로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동아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했다.
장한이 서쪽으로 도주하자 항량이 그 뒤를 추격했다.
그러나 제나라가 전가를 왕으로 세운 것에 분노한 전영은 항량을 따르지 않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왕 가를 공격하여 쫓아냈다.
전가는 초나라로 달아나고, 전각은 조나라로 달아났다.
전각의 동생 전간은 그 전에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조나라로 갔다가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그곳에 계속 머물렀다.
전영이 즉시 전담의 아들 전불을 제왕으로 삼고 자신은 상국이 되고 전횡을 장군으로 삼아 제나라를 평정했다.
항량이 장한의 뒤를 추격했으나 장한은 지원군을 얻어 군세가 성하게 되었다.
항량이 사자를 조와 제 두 나라에 보내 힘을 합쳐 장한을 공격하려고 했다.
전영이 말했다.

"초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이면 우리가 즉시 군사를 보내 돕겠다."

초회왕이 듣고 말했다.

"전가는 우리의 동맹국의 왕으로써 처지가 곤궁하게 되어 몸을 의탁해 온 그를 죽이는 것은 의가 아니다."  

조나라 역시 전각과 전간을 죽이지 않았다. 제나라가 다시 말했다.

"독사에게 손을 물었다면 손을 잘라야하고 다리를 물렸다면 다리를 잘라야한다. 어째서인가? 그대로 놔두면 그것으로 인해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 지금 전가, 전각, 전간에 대해 초와 조와 두 나라는 모두 그들이 수족과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하면서 어째서 그들을 죽이지 않는단 말인가? 만일 진나라가 다시 천하를 얻어 안정시킨다면 지금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자들은 모두 무덤으로 보내져 묻히게 될 것이다."

초와 조 두 나라는 제나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제나라 역시 노하여 결국 군사를 보내 돕지 않았다.
장한이 과연 항량을 죽이고 초나라 군사를 격파했다.
싸움에 진 초나라 군사들은 동쪽으로 도주했다.
그래서 장한은 하수를 건너 조나라를 거록(鉅鹿)에서 포위했다.
이에 조나라를 구한 항우가 제나라를 원망했다.
이미 조나라를 구하고 장한 등의 진나라 장수와 군사들의 항복을 받아 서진하여 함양을 파괴하고 진나라를 멸한 항우는 부하 장수들을 제후왕으로 봉했다.
그때 제왕 전불(田巿)은 교동왕(膠東王)에 치소를 즉묵(卽墨)으로 옮기도록 하고 제나라 출신 전도(田都)가 항우를 따라 종군하여 조나라를 구하고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여 제왕에 봉하고 제왕을 위하여 임치(臨菑)에 성을 세워 치소로 삼게 했다.
그리고 옛날 제왕 왕건(王建)의 손자 전안(田安)은 항우가 거록의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 바야흐로 도하하려고 하는 때에 제북(濟北)의 여러 성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와서 항우에게 투항했다.
항우는 전안을 제북왕에 봉하고 박양(博陽)을 치소로 삼게 했다.
전양은 항량의 청을 거절하고 진나라를 공격하던 초와 조를 군사를 보내 돕지 않았다고 해서 왕에 책봉되지 않았다.
조나라 장수 진여(陳餘)도 역시 제후왕에 봉해지지 않았음으로 두 사람은 함께 항우를 원망하게 되었다.
항우가 동쪽으로 돌아가자 제후왕들은 각기 자기의 봉국에 부임했다.
전영이 군사를 보내 진여를 도와 조나라에서 반기를 들도록 하고 전영 자신도 역시 군사를 내어 전도를 공격했다.
전도는 초나라로 도망쳤다.
전영은 다시 제왕 전불을 억류시켜 머물게 하고 교동왕으로 봉한 항우의 명을 받들지 말도록 했다.

전불의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말했다.

"강포한 항왕이 왕을 교동에 봉했는데 만일 봉국에 부임하지 않으면 필시 목숨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전불이 항우의 후환을 두려워하여 도망쳐 교동의 봉국에 부임했다.
전영이 노하여 그 뒤를 추격하여 제왕 전불을 즉묵에서 죽이고 다시 돌아와 제북왕 전안을 공격하여 죽였다.
그래서 전영은 즉시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삼제의 땅을 병탄했다.
항왕이 듣고 대노하여 북쪽으로 진격하여 제나라 정벌전에 나섰다.
제왕 전영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평원(平原)으로 도창쳤으나 평원의 현지인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항우는 제나라 땅의 성곽을 모두 불태워 그가 지나가는 곳은 파괴되어 모두 평지가 되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 항우에 항거했다.
전영의 동생 전횡이 제나라의 패잔병들을 수습해 몇 만 명의 군사를 얻어 성양(城陽)에서 주둔하며 항우에 대항했다.
그때 마침 한왕이 제후들을 이끌고 초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팽성(彭城)에 입성했다.
항우가 듣고 즉시 성양의 포위를 풀고 돌아가 한나라 군사를 팽성에서 공격하기 시작해서 한나라와 싸움이 이어져 형양에서 서로 대치했다.
이 기회를 틈타 전횡은 항우에게 점령당했던 제나라의 땅을 모두 수복하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상국이 되어 제나라의 국정을 전결했다.
제나라의 크거나 작거나 막론하고 모든 정사를 왕과 의논하지 않고 자기 혼자 결정했다.
전횡이 제나라를 평정하고 3년 뒤에 한왕이 역생(酈生)을 사자로 보내 제왕 전광과 상국 전힁에게 유세하도록 하자 전횡이 역생의 말에 동의하고 역하(曆下)에 포진하고 있던 제군의 수비을 해제하도록 했다.
그때는 한나라 장수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군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던 순간이었다.
제나라는 처음에 화무상(華無傷)과 전해(田解)를 시켜 역하에서 한군을 막도록 했다.
이윽고 한나라 사자가 제나라에 당도하자 역하의 수비군의 경계를 풀고 주연을 배풀어 한나라와 강화를 맺도록 하고 제나라에서도 강화사절을 한나라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한나라 장수 한신은 이미 조와 연 지방을 평정하고 이어서 괴통(蒯通)의 계책을 받아들여 하수를 도하하여 평원을 도하하여 역하의 제군을 기습해서 격파하고 승세를 타고 임치에 입성했다.
제왕 전광과 상국 전힁이 노하여 역생이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팽살(烹殺 :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형벌)시켰다.
제왕 전광은 동쪽으로 달아나 고밀(高密)로 들어가고 상국 전횡은 박양(博陽)으로 수비 책임자 전광(田光)은 성양(城陽)으로, 장군 전기(田旣)는 교동(膠東)으로 각각 흩어져 후일을 도모했다.
초나라가 장군 용저(龍且)를 시켜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용저는 고밀의 제왕 군사들과 합쳐 유수(濰水)에서 한군과 회전했다.
한나라 장수 한신과 조참은 용저를 죽이고 제왕 전광을 사로잡았다.
또 관영(灌嬰)은 제나라 수비군 대장 전광(田光)을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박양에 있던 전횡은 제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라 관영의 한군을 공격했다.
관영은 전횡의 군사를 영(嬴)에서 격파했다.
전횡은 도망쳐 양나라로 들어가 팽월에 의탁했다.
팽월은 그때 양나라에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며 한나라 편에 설지 초나라 편에 설지 망설이고 있었다.
용저를 죽이고 초제연합군을 격파한 한신의 령을 받은 조참은 진군하여 교동에서 전기(田旣)를 죽이고 제군을 무찔렀다.
또한 관영은 제장 전흡(田吸)을 천승에서 살해했다.
한신이 제나라를 평정하자 스스로 제왕의 대리에 올려달라고 한왕에게 청하자 한왕은 그를 대리가 아닌 제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일 년 후, 한나라가 항적을 멸하고 한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팽월을 양왕(梁王)으로 봉했다.
한왕에 의해 살해 될 것을 두려워한 전횡은 그의 부하 5백여 명과 함께 바다로 나아가 섬에서 살았다.
고조가 듣고 원래 전횡 형제들은 제나라 본토인으로써 제나라 출신의 현능한 자들이 모두 그들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 섬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을 거두지 않는다면 후에 환란의 원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자를 보내 전횡의 죄를 사면한다고 통지하고 불러오도록 시켰다.

전횡이 고조의 부름을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폐하의 사자 역생을 팽살시켰습니다. 지금 들으니 한나라 장수 역상은 역생의 동생으로써 매우 현능하다고 합니다. 신은 역상(酈商)을 보기가 매우 두렵습니다. 폐하의 조명을 받들 수 없으니 청컨대 서인으로 만들어 이 섬을 지키며 살겠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고하자 고황제는 즉시 위위(衛尉) 역상을 불러 조명을 내렸다.

"이곳에 당도하게 될 제왕 전횡을 보고 인마를 끌고와 소란을 피우는 인가 있다면 그들을 모두 멸족형에 처하도록 하라!"

그런 다음 다시 사자에게 부절을 주어 역상에게 내린 조칙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황제의 명을 전하도록 했다.

"전횡이 보름에 응하여 오게 되면 큰 사람은 왕으로, 작은 사람은 후에 봉할 것이되, 오지 않는다면 군사를 보내 모두 주살할 것이다."

전횡과 그의 빈객 두 사람이 조칙을 받들어 낙양을 향해 출발했다.

이윽고 전횡의 일행이 낙양 30리 못 되는 시향(屍鄕)이라는 곳의 역참에 당도하자 전힁이 사자에게 말했다.

"신하된 자가 천자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자는 가는 길을 멈추고 유숙했다.

전횡이 그의 빈객들에게 말했다.

"이횡이 처음에 한왕과 함께 남면하여 고(孤)를 칭하다가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고 이 횡은 포로의 몸으로 북면하여 남을 받드는 신세가 되었으니 그런 일들은 사람된 자로써 지극히 참기 힘든 치욕이오. 하물려 지금 내가 그 형을 팽살시키고 그 동생은 지금 여러 제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황제를 모시고 있는데, 지금 천자의 조칙을 두려워하여 어쩔 수 없어 감히 나를 어쩌지 못하고 있소. 그렇다고 해서 계면쩍은 내 마음이 사라지겠소? 그러나 황제폐하께서 나를 부른 것은 단지 나의 얼굴과 모습을 한 번 볼려고 해서요. 지금 폐하께서는 낙양(洛陽)에 계시니 내 머리를 베어 가지고 달려간다면 30리 거리라 내 모습이 상하지 않아 폐하께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오."

말을 마친 전힝이 즉기 자기 목을 찔러 죽으면서 빈객들에게 자기의 목을 간수하여 사자와 함께 달려가 고제에게 바치게 했다.
고제가 보고 탄식했다.

"아아, 진실로 의기가 굳은 장부로다! 포의(布衣)의 몸으로 몸을 일으켜 삼형제가 모두 차례로 왕이 되었으니 어찌 그들이 현능한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고제가 전횡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전힁의 두 빈객을 모두 도위(都尉)에 임명하고 2천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제후왕에게 행해는 예에 따라 전횡의 장례를 치르게 했다.
전횡의 장례라 끝나자 두 사람의 빈객은 무덤 옆에 굴을 파더니 같이 목을 찔러 죽어 전횡을 위해 순사했다.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란 고제는 전힁의 빈객 대부분이 현능한 사람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직도 섬에는 5백 명의 빈객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고제는 사자를 보내 모두 불러오게 했다.
섬에 당도한 사자가 전횡의 죽음을 빈객들에게 전하자 그들 역시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전횡 형제들이 능히 현능한 선비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태사공이 말한다.

“참으로 심하도다. 괴통의 지모여! 제나라를 혼란에 빠뜨렸으며 회음후를 교만하게 만들어 마침내는 그 두 사람을 망하게 만들었다. 괴통(蒯通)은 이해득실의 변설에 능하여 전국의 권변에 관한 일을 논해 81편의 저술을 남겼다. 괴통은 제인(齊人) 안기생(安其生)과 친분이 있었다. 안기생은 일찍이 항우에게 계책을 내어 임용되기를 청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협량한 항우는 안기생의 계책을 채용할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항우는 이 두 사람을 봉하여 곁에 두려고 했다. 두 사람은 항우가 내리는 봉작을 받지 않고 도망쳐 몸을 숨겼다. 전횡의 높은 의기를 경모한 그이 빈객들이 따라 죽었으니 전횡을 어찌 현능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전힁의 사적을 기록하여 열전을 지은 것이다. 천하에는 다른 사람의 사적을 잘 묘사하는 사람이 많음에도, 전힁의 사적에 대해서만은 이야기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무슨 이유때문인가?"

저자소개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
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사마천의 사기시리즈 제1권)(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 총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