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반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

지은이 : 고종문
출간일 : 2015-06-12
판매가 : 8,000원
포멧 : 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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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및 세가,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에서는 사마천의 사기 본기와 세가, 그리고 열전 속의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특히, 각권에서는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를 첨부하였다.

목차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관, 역사관 그리고 세계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 배경
1) 시대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기열전

1. 백이열전(伯夷列傳)
1) 불사이군(不事二君) 2) 천도시야비야(天道是耶非耶) 3) 부기미(附驥尾) 4)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 5) 거세혼탁 청사내현(擧世混濁 淸士乃見)

2. 관안열전(管晏列傳)
1) 삼불후(三不朽) 2) 관포지교(管鮑之交) 3) 안자이어(晏子之御)

3.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1) 양고심장(良賈深藏) 2) 식여도(食餘挑) 3) 세난(說難)

4. 사마양저열전(司馬穰苴列傳)
1) 인미언경(人微言輕)

5.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
1) 즉삼령오신지(卽三令五申之) 2) 연저지인(吮疽之仁) 3) 와신상담(臥薪嘗膽)

6.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
1) 일모도원(日暮途遠)

7. 중니제자열전(中尼弟子列傳)
1) 이모취인(以貌取人) 2) 서하지통(西河之痛) 3) 단표누항(簞瓢陋巷)

8. 상군열전(商君列傳)
1) 이목지신(移木之信) 2) 상앙지법(商鞅之法)

9.-10. 소진장의열전(소진열전(蘇秦列傳), 장의열전(張儀列傳))
1) 합종 – 소진(蘇秦) 2) 연횡–장의(張儀) 3) 계구우후(鷄口牛後)
4) 전거후공(前倨後恭) 5) 고침안면(高枕安眠) 6) 일거양득(一擧兩得)

11. 저리자감무열전(樗里子甘茂列傳)
1) 삼인성호(三人成虎) 2) 증삼살인(曾參殺人)

12. 양후열전(穰侯列傳)
1) 색은찬술(索隱讚述)의 평가

13. 백기왕전열전(白起王煎列傳)
1) 전필승공필취,전신백기(戰必勝攻必取,戰神白起) 2) 장평대전 갱살항졸(長平大戰 坑殺降卒) 3) 위칭중병 거불수명(僞稱重病 拒不受命)
4) 두우위륙(杜郵爲戮) 5) 투합취용 이지몰신(偸合取容 以至圽身)

14.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
1) 견백동이(堅白同異) 2) 담천객(談天客)

15. 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
1) 일기일예(一技一藝) 2) 교토삼굴(狡兎三窟) 3) 계명구도(鷄鳴狗盜) 목경지환(木梗之患)

16. 평원군우경열전(平原君虞卿列傳)
1) 이령지혼(利令智昏) 2) 낭중지추, 모수자천(囊中之錐, 毛遂自薦)

17. 위공자열전(魏公子列傳)
1) 인거매장(引車賣漿) 2) 절부구조(竊符救趙)

18. 춘신군열전(春申君列傳)
1) 사호지교(四豪之交)

19.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
1) 누란지위(累卵之危) 2) 항룡유회(亢龍有悔) 3) 성공자퇴(成功者退)
4) 월만즉휴(月滿則虧) 5) 탁발막수(擢髮莫數) 6) 청운직상(靑雲直上) 
7) 원교근공(遠交近攻) 8) 애자필보(睚眦必報)

20. 악의열전(樂毅列傳)

21.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
1) 완벽(完璧)과 하자(瑕疵) 2) 부형청죄(負荊請罪) 3) 문경지교(刎頸之交) 4) 포의지교(布衣之交) 5) 노발충관(怒髮衝冠)

22. 전단열전(田單列傳)
1) 안도(安堵) 2) 출기제승(出奇制勝) 3) 화우지계(火牛之計)
4) 물망재거(勿忘在莒)

23.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1) 명주암투(明珠暗投) 2) 걸견폐요(傑犬吠堯)

24. 굴원가생열전(屈原賈生列傳)
1) 구사일생(九死一生) 2) 회사의 부(懷沙의 賦)

25. 여불위열전(呂不韋列傳)
1) 일자천금(一字千金) 2) 기화가거(奇貨可居)

26. 자객열전(刺客列傳)
1) 방약무인(傍若無人)

27. 이사열전(李斯列傳)
1) 소재소거 인고택지(鼠在所居 人固择地) 2) 성대공자 재인하흔수인지(成大功者 在因瑕衅而遂忍之) 3) 간축객령(諫逐客令) 4) 분서갱유(焚書坑儒) 5) 지록위마(指鹿爲馬)

28. 몽염열전(蒙恬列傳)
1) 성명낭자(聲名狼藉)

29.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
1) 물경지교(勿頸之交)

30.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
1) 석권(席卷) 2) 운증용병(雲蒸龍變)

31. 경포열전(鯨布列傳)

3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
1) 과하지욕(袴下之辱) 표모반신(漂母飯信) 2) 소하월하추한신(蕭何月下追韓信) 3) 성역소하(成亦蕭何) 패역소하(敗亦蕭何) 4)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5) 토사구팽(兎死狗烹) 6) 다다익선(多多益善) 7) 배수지진(背水之陣)

33.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
1) 명성과실(名聲過實)

34. 전담열전(田儋列傳)

35. 번역등관열전(樊酈縢灌列傳)
1) 구(狗)와 견(犬)의 쓰임새

36. 장승상열전(張丞相列傳)
1) 기기애애(期期艾艾) 2) 걸해골(乞骸骨)

37.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
1) 고양구도(高陽舊徒) 2) 낙백(落魄)

38. 부근괴성열전(傅靳蒯成列傳)

39. 유경숙손통열전(劉敬叔孫通列傳)
1) 부족치치하간(不足置齒牙間)

40. 계포난포열전(季布欒布列傳)
1) 계포일락(季布一諾)

41. 원앙조조열전(袁盎晁錯列傳)
1) 목불교첩(目不交睫)

42. 장석지풍당열전(張釋之馮唐列傳)
1) 풍당이로 이광난봉(馮唐易老 李廣難封)

43. 만석장숙열전(萬石張叔列傳)

44. 전숙열전(田叔列傳)
1) 무출기우(無出其右)

45. 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
1) 순망치한(唇亡齒寒)과 가도멸괵(假途滅虢) 2) 휘질기의(諱疾忌醫)
3) 기사회생(起死回生) 4) 여섯가지 불치병

46.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
1) 지강급미(舐糠及米)

47. 위기무안후열전(魏其武安侯列傳)
1) 한상지만(恨相知晩) 2) 수서양단(首鼠兩端) 3) 유언비어(流言蜚語)

48. 한장유열전(韓長孺列傳)
1) 사회복연(死灰復燃) 2) 강노지극(彊弩之極) 3) 사기색은술찬(史記索隱述贊)의 평가

49.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1)도리불언 하자성혜(挑李不言 下自成蹊) 2) 중석몰촉(中石沒鏃)

50. 흉노열전(匈奴列傳)

51.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52. 평진후주보열전(平津侯主父列傳)

53. 남월열전(南越列傳)

54. 동월열전(東越列傳)

55. 조선열전(朝鮮列傳)

5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5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1) 과염선치(寡廉鮮恥) 2) 자허오유(子虛烏有)

58.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1) 척포두속(尺布斗粟) 2) 민간에서 회남려왕을 위해 지은 노래

59. 순리열전(循吏列傳)
1) 발규거직(拔葵去織)

60. 급정열전(汲鄭列傳)
1) 문전작라(門前雀羅)

61. 유림열전(儒林列傳)
1) 곡학아세(曲學阿世)

62. 혹리열전(酷吏列傳)
1) 누망지어(漏網之魚) 2) 여랑목양(如狼牧羊) 3) 불한이율(不寒而慄)

63. 대완열전(大苑列傳)

64. 유협열전(遊俠列傳)
1) 명불허립(名不虛立)

65. 영행열전(佞幸列傳)
1) 불명일전(不名一錢)

66. 골계열전(滑稽列傳)
1) 돈제일주(豚蹄一酒) 2) 동곽리(東郭履) 3) 배반낭자(杯盤狼藉)
4) 불비불명(不蜚不鳴)

67. 일자열전(日者列傳)

68. 귀책열전(龜策列傳)

69. 화식열전(貨殖列傳)
1) 화식열전속의 내용 요약

7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71. 보임안서(報任安書)
1) 구우일모(九牛一毛) 2) 대분망천(戴盆望天) 3) 인고유일사 혹중우태산 혹경우홍모 지소추이야((人固有一死, 或重于泰山, 或輕于鴻毛, 用之所趨異也)

책리뷰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그림 Historia와 헤로도투스(출처: 구글)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사기’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그림 사마천의 초상화(출처: 구글)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①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② 38세,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③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④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아래에서 시기별로 나눠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사마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림 한성시에 위치한 사마천동상(구글)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마는 성이고 이름은 천이다.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부여받는 이름으로, 관명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이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 정도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으로 천문과 달력, 그리고 고전도 능하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마천이 7세 때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은 용문의 산간벽지에서 소를 치는 등 목축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천은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 사마담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듯이, 사마담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고전을 읽었고, 특히 역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4살 때부터 사마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10대 무렵에는 고문서를 읽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다양한 인재들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선조들은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30여년간 한무제 밑에서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했다.
사관이란 원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관이라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은 상태로 오직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서의 편찬을 계획했다.
사마담은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이 13세(133년)무렵부터 고향에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와 위수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장답사를 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자질과 지식을 쌓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마담은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현명한 임금과 충신과 의사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마천은 20세(126년)경, 사마천은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여행하기 시작했다.
약 2-3년간의 여행이었으나, 훗날 사기 집필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마천은 이후 낭중(郎中), 즉 황제의 비서관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몸소 체험하고 터득했다.
그 즈음,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하늘과 땅에 드리는 봉선제를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도 당연히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사마담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된다.
사마담은 탄식하며 낙담하여 결국은 화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이 사건...
참고로 봉선이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이다.
봉선(封禪)은 제후들이 선(禪)을 통하여 천자(天子)로 부터 봉작(封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봉작(封爵)은 천자(天子)가 제후들에게 봉선제(封禪祭)를 열고 각 제후들은 태산의 원구단(圓丘壇)에 모여 선(禪)을 행한 뒤 그 평가가 내려지고 선통(禪統)의 깊고 낮음에 따라 천자(天子)가 작위와 땅을 봉(封)해 주는 것을 봉작(封爵)이라고 한다.

제왕운기에 봉선(封禪)에 대한 기록이 있다.

“평생을 통해서라도 도(道)를 열지 않으면 안 되며 오행(五行)을 암송하고 외우면서 반드시 선(禪)을 통해야 군주가 될 수 있다.”

봉선의 전통은 상고시대에서 부터 한나라때까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그 규칙과 예법은 예기(禮記)와 사기(史記)의 봉선서(封禪書)에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봉선(封禪)은 흙을 쌓아 단을 만들고 하늘과 땅에 지내는 제사이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누구나 이 행사를 거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 태산에서 봉선제를 주관하는 광경(출처: 구글)

역사에 길이 남을 만큼 강력하지 않은 이상 봉선제를 하긴 힘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태평성대를 누렸던 황제, 통치기간 중 길한 조짐이 나타난 황제들만 이 의식을 치를 수 있었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그림 대나무로 만든 죽간, 나무로 만든 목간(출처: 구글)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2. 왜 사기(史記)인가?




















왜 사마천의 사기인가?
사기는 중국고대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3천 여년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 사실기록이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고증과 기행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 - 즉 기전체를 창안했다.
중국의 역사는 국가에서 관장하는데, 이후의 24정사 모두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가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는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중국의 불타 없어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기는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가미된 감정을 이입시킨다.
결국 문사철이 가미된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기니긴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의 메아리를 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절대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꼿꼿한 표상’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사마천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켜 역사상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위를 주는 것은 물론 지주가 되고 있다.
보통 역사는 승자편이라고들 한다.
또한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예외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되새기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보편적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진섭같은 머슴도 제후의 반열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보통사람들도 사기를 읽고 동일시하면서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곤 했다.
사기를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제3편


사기열전(史記列傳)


















1. 伯夷列傳第一(백이열전제일)
2. 管晏列傳第二(관안열전제이)
3. 老子韓非列傳第三(노자한비열전제삼)
4. 司馬穰苴列傳第四(사마양저열전제사)
5. 孫子吳起列傳第五(손자오기렬전제오)
6. 伍子胥列傳第六(오자서열전제육)
7. 仲尼弟子列傳第七(중니제자열전제칠)
8. 商君列傳第八(상군열전제팔)
9. 蘇秦列傳第九(소진열전제구)
10. 張儀列傳第十(장의열전제십)
11. 樗里子甘茂列傳第十一(저리자감무열전제십일)
12. 穰侯列傳第十二(양후열전제십이)
13. 白起王翦列傳第十三(백기왕전열전제십삼)
14. 孟子荀卿列傳第十四(맹자순경열전제십사)
15. 孟嘗君列傳第十五(맹상군열전제십오)
16. 平原君虞卿列傳第十六(평원군우경열전제십육)
17. 魏公子列傳第十七(위공자열전제십칠)
18. 春申君列傳第十八(춘신군열전제십팔)
19. 范睢蔡澤列傳第十九(범휴채택열전제십구)
20. 樂毅列傳第二十(락의열전제이십)
21.廉頗藺相如列傳第二十一(렴파린상여열전제이십일)
22.田單列傳第二十二(전단열전제이십이)
23.魯仲連鄒陽列傳第二十三(노중연추양열전제이십삼)
24.屈原賈生列傳第二十四(굴원가생열전제이십사)
25.呂不韋列傳第二十五(여불위열전제이십오)
26.刺客列傳第二十六(자객열전제이십육)
27.李斯列傳第二十七(이사열전제이십칠)
28.蒙恬列傳第二十八(몽념열전제이십팔)
29.張耳陳餘列傳第二十九(장이진여열전제이십구)
30.魏豹彭越列傳第三十(위표팽월열전제삼십)
31.黥布列傳第三十一(경포열전제삼십일)
32.淮陰侯列傳第三十二(회음후열전제삼십이)
33.韓信盧綰列傳第三十三(한신로관열전제삼십삼)
34.田儋列傳第三十四(전담열전제삼십사)
35.樊酈滕灌列傳第三十五(번력등관열전제삼십오)
36.張丞相列傳第三十六(장승상열전제삼십육)
37.酈生陸賈列傳第三十七(력생육가열전제삼십칠)
38. 傅靳蒯成列傳第三十八(부근괴성열전제삼십팔)
39. 劉敬叔孫通列傳第三十九(류경숙손통열전제삼십구)
40. 季布欒布列傳第四十(계포란포열전제사십)
41. 袁盎鼂錯列傳第四十一(원앙조착열전제사십일)
42. 張釋之馮唐列傳第四十二(장석지풍당열전제사십이)
43.萬石張叔列傳第四十三(만석장숙열전제사십삼)
44. 田叔列傳第四十四(전숙열전제사십사)
45. 扁鵲倉公列傳第四十五(편작창공열전제사십오)
46. 吳王濞列傳第四十六(오왕비열전제사십육)
47. 魏其武安侯列傳第四十七(위기무안후열전제사십칠)
48. 韓長孺列傳第四十八(한장유열전제사십팔)
49. 李將軍列傳第四十九(이장군열전제사십구)
50. 匈奴列傳第五十(흉노열전제오십)
51. 衛將軍驃騎列傳第五十一(위장군표기열전제오십일)
52. 平津侯主父列傳第五十二(평진후주부열전제오십이)
53. 南越列傳第五十三(남월열전제오십삼)
54. 東越列傳第五十四(동월열전제오십사)
55. 朝鮮列傳第五十五(조선열전제오십오)
56. 西南夷列傳第五十六(서남이열전제오십육)
57. 司馬相如列傳第五十七(사마상여열전제오십칠)
58. 淮南衡山列傳第五十八(회남형산열전제오십팔)
59. 循吏列傳第五十九(순리열전제오십구)
60. 汲鄭列傳第六十(급정열전제육십)
61. 儒林列傳第六十一(유림열전제육십일)
62. 酷吏列傳第六十二(혹리열전제육십이)
63. 大宛列傳第六十三(대완열전제육십삼)
64. 游俠列傳第六十四(유협열전제육십사)
65. 佞幸列傳第六十五(녕행열전제육십오)
66. 滑稽列傳第六十六(골계열전제육십육)
67. 日者列傳第六十七(일자열전제육십칠)
68. 龜策列傳第六十八(귀책열전제육십팔)
69. 貨殖列傳第六十九(화식열전제육십구)
70. 太史公自序(태사공자서)

본서는 총 70편이다. 여기서는 반고의 한서에 실린 보임안서까지 총 71편을 다룬다.








1. 백이열전(伯夷列傳)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로 역사시대 최초의 중국의 왕조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그림 은허문자(출처: 구글)

왜냐하면 상나라의 역사, 사회, 문화를 기록한 문헌인 갑골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상나라의 마지막 도읍지는 은허(殷墟)로 '은의 폐허'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상나라를 은나라 혹은 은상(殷商)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림 백이와 숙제의 모습(출처: 구글)


문자로 역사를 기록한 것은 상나라가 중국역사상 가장 처음이다.
사마천이 사기열전의 첫 번째로 기록한 인물은 첫 인물 백이와 그의 막내동생 숙제는 공자보다 더 먼 시절 사람이다.
시기는 바야흐로 은(殷)나라 말기였다.
당시 주왕(紂王)의 포악한 정치로 각 지역 제후들의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고죽국(孤竹國; 하북성, 노룡현과 요령성 조양현 일대)의 두 왕자는 서로 왕위를 사양했다.
왜냐하면 고죽국의 군주는 죽기 전에 셋째 아들 숙제(叔齊)에게 나라를 맡으라고 유언을 했다.
하지만 당시의 관습은 장자(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고로 숙제는 왕위 계승을 마다하고 형인 백이(伯夷)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 했다.
그러나 장자 백이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숙제가 왕위를 계승할 것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백이는 나라를 떠나기로 결정 하였다.
숙제 역시 그를 따라 나라를 떠났다.

후에 고죽국의 왕위는 하는 수없이 그들의 아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당시 고죽국(孤竹國)의 두 왕자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서로 왕위를 사양하며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아버지는 본래 동생인 숙제를 더 신임하여 공의 지위를 물려주려했다.
보통 형제간 서열의 명칭은 백중숙계(伯-仲-叔-季)의 순서에 따라 매겨진다.
즉 백이는 맏아들, 숙제는 셋째 아들이었다.
아버지가 죽자 숙제는 마땅히 맏아들인 백이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며 사양하였다.
하지만 형 백이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숙제가 왕위에 올라야 한다면서 사양했다.

1) 불사이군(不事二君)

백이와 숙제는 서로 왕위를 이어받지 않으려고 궁을 나가버렸다.
후에 고죽국의 왕위는 하는 수 없이 둘째가 이어받았다.
백이와 숙제가 서로 왕위를 양보하였다는 소문이 세상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들이 부귀를 다투지 않고 서로 양보한 '현인(賢人)' 또는 '군자(君子)'라고 여기며 존경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나라를 떠난 후, 먼저 주왕(紂王)에게로 갔다가 실망하고는‘듣자하니 서백이 노인들을 공경하고 잘 모신다는 말이 있는지라’서백후 문왕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도읍에 도착해 보니, 서백후 문왕(文王)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무왕이 통치했다.
무왕은 상나라 주왕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침내 출병할 때 곁에 있던 모든 사람이 참전을 결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거절하며 말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위패를 모시고 전쟁을 일으킴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며, 신하된 자로서 천자를 시해하려는 것도 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仁)도 의(義)도 아닙니다.”

군사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 하자 곁에 있던 사상보 강태공이 만류하여 두 사람은 목숨을 건졌다.
곧 은이 멸망하고 희발이 새 나라의 천자가 되자 백이와 숙제는“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不事二君)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백이숙제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고 생을 연명했다.
그때 새 나라의 관리가 된 왕지창이란 사람이 고죽국을 지나다가 그들을 떠올리며 힐난했다.

“주나라의 녹을 먹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지금 주의 땅에서 난 고사리로 연명하는 것은 옳은가.”

백이숙제가 그 말을 전해 듣고 다시 뉘우쳐 고사리조차 먹기를 거부하다가 그대로 굶어죽었다고 한다.

백이와 숙제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에 올라 산중의 고비나 꺾자구나.
포악한 것으로 포악한 것을 바꾸었으니
그 잘못을 알지 못하는구나.
신 농(神農) 우(虞) 하(夏)의 시대는 홀연히 지나가 버렸으니
우리는 장차 어디로 돌아간다는 말인가?
아! 이제는 죽음뿐이로다.
쇠잔한 우리의 운명이여!

저자소개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열전(키메이커)
고사성어로 읽는 사마천의 사기본기 및 세가(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 총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