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이 지은『사기』는 중국인 특히 한족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황제로부터 시작하여 사마천의 시대, 즉 한나라 무제에 이르는 거의 3,000여 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는 통사이다.
사기의 구성은 제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12본기, 연대기에 해당하는 10표, 각종 제도와 문물의 연혁을 기록한 8서, 제후국들의 권력 승계 및 역사를 기록한 30세가, 역사 속 인물들에 관한 기록인 70열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기』 본기는 천자나 황제, 세가는 제후 혹은 제후왕이 아닌 인물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이는 사마천의 역사를 이해하는 시각이 일정한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이라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마천은 민족이나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수많은 인물들을 총망라했다.
<사기시리즈 제1권>에서는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본기 및 세가”에 대해 알아보았다. 특히, 사마천과 사기를 자세히 알기 위해 각권 공히“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부분을 첨가하였다.
사기시리즈 제2권(사기열전 제1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편 백이열전부터 제18편 춘신군열전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3권(사기열전 제2권)에서는 사기열전의 제19편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부터 제33편 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4권(사기열전 제3권)에서는 제34편 전담열전(田儋列傳)부터 제53편 남월열전(南越列傳)까지 다룬다.
사기시리즈 제5권(사기열전 제4편)에서는 제54편 동월열전(東越列傳)부터 제70편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를 다룬 후, 마지막으로 사마천의 편지인 보임안서를 싣는다.(원래 보임안서는 사기에는 없고 반고의 한서에 실려 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 <제4권>
<차례>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 및 역사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배경
1)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건국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기열전
54. 동월열전(東越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민월왕 무저(閩越王 無諸)와 동해왕 요(東海王 搖)
3) 고사성어(생략)
4) 동월열전(東越列傳) 전문
55. 조선열전(朝鮮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위만(衛滿)
3) 고사성어(생략)
4) 조선열전(朝鮮列傳) 전문
56.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생략)
3) 고사성어(생략)
4)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전문
57.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사마상여(司馬相如)
3) 고사성어
(1) 과염선치(寡廉鮮恥)
(2) 자허오유(子虛烏有)
4)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 전문
58.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회남왕 유장(淮南王 劉長)
(2) 형산왕 유사(衡山王 劉賜)
3) 고사성어
(1) 척포두속(尺布斗粟)
4) 회남형산열전(淮南衡山列傳) 전문
59. 순리열전(循吏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손숙오(孫叔敖)
(2) 자산(鄭子產)
(3) 공의휴(公儀休)
(4) 석사(石奢)
3) 고사성어
(1) 발규거직(拔葵去織)
4) 순리열전(循吏列傳) 전문
60. 급정열전(汲鄭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급암(汲黯)
(2) 정당시(鄭當時)
3) 고사성어
(1) 문전작라(門前雀羅)
4) 급정열전(汲鄭列傳) 전문
61. 유림열전(儒林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숙손통(叔孫通)
(2) 원고생(轅固生)
(3) 복생(伏生)
(5) 동중서(董仲舒)
3) 고사성어
(1) 곡학아세(曲學阿世)
4) 유림열전(儒林列傳) 전문
62. 혹리열전(酷吏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3) 고사성어
(1) 누망지어(漏網之魚)
(2) 여랑목양(如狼牧羊)
(3) 불한이율(不寒而慄)
4) 혹리열전(酷吏列傳) 전문
63. 대완열전(大苑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장건(張騫)
3) 고사성어(생략)
4) 대완열전(大苑列傳) 전문
64. 유협열전(遊俠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주가(朱家)
(2) 극맹(劇孟)
(3) 곽해(郭解)
3) 고사성어
(1) 명불허립(名不虛立)
4) 유협열전(遊俠列傳) 전문
65. 영행열전(佞幸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한고조와 적유(籍)
(2) 효혜제와 굉유(閎)
(3) 효문제와 등통(鄧通)
3) 고사성어
(1) 불명일전(不名一錢)
4) 영행열전(佞幸列傳) 전문
(1) 등통(鄧通)
(2) 한언(韓嫣)
(3) 이연년(李延年)
66. 골계열전(滑稽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순우곤(淳于髡)
(2) 우맹(優孟)
(3) 우전(優旃)
3) 고사성어
(1) 돈제일주(豚蹄一酒,
(2) 동곽리(東郭履)
(3) 배반낭자(杯盤狼藉)
(4) 불비불명(不蜚不鳴)
4) 골계열전(滑稽列傳) 전문
67. 일자열전(日者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송충(宋忠)
(2) 가의(賈誼)
3) 고사성어(생략)
4) 일자열전(日者列傳) 전문
68. 귀책열전(龜策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생략)
3) 고사성어(생략)
4) 귀책열전(龜策列傳) 전문
69. 화식열전(貨殖列傳)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태공망(太公望)
(2) 계연(計然)
(3) 범려(范蠡)
(4) 자공(子貢)
(5) 백규(白圭)
(6) 탁씨(卓氏)
(7) 공씨(孔氏)
3) 고사성어
4) 화식열전(貨殖列傳) 전문
70.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제나라 환공(桓公)
(2) 관중(管仲)
(3) 안영(晏弱)
71. 보임안서(報任安書)
1) 개관
2) 등장인물소개
(1) 임안(任安)
3) 고사성어
(1) 구우일모(九牛一毛)
(2) 대분망천(戴盆望天)
4) 보임안서(報任安書) 전문
<참고자료>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역사는 시간 속에서 일어난다.
시간은 두 가지 속성이 있다.
아침이 오면 점심이 오고, 곧 저녁이 곧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곧 겨울이 온다.
시간, 세월은 이런 과정을 반복한다.
이처럼 시간은 반복되는 속성, 즉 순환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게 시간의 첫 번째 속성이다.
두 번째 속성은 시간은 한 방향으로 만 진행한다는 점이다.
절대로 ‘뒤로 역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시간 속에서 역사가 진행된다.
역사란 보통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ly event)’을 칭한다.
역사를 읽는 것이 왜 중요한가?
역사는 ‘사실(fact)을 우리에게 투영시킴’으로서 현재를 알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해답을 주고 지혜를 준다.
헤로도투스는 그리스, 로마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그는 대략 기원전 480년경~420년경 사람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다.
서양 문화에서 그는 "역사학의 아버지"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HISTORIA)라는 책을 썼다.
그는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사료를 수집하고 사료의 정확성을 검증하였다.
이 책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479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에 대한 자신의 '탐구'(ἱστορίαι, 이 낱말은 라틴어 historia로 차용되어 오늘날 여러 유럽어에서 '역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를 기록한 것으로, 다른 문헌이 거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2. 사마천의 생애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동양, 중국 최초의 역사가이다.
그의 작품 ‘사기’ 130편은 상고시대부터 자신의 당대까지의 3000여년의 중국 통사이다.
사마천의 사기이후, 약 2천년동안 이 책은 중국의 모든 역사서의 모델 즉, 정통역사서(正統歷史書) -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참고> 중국의 정사 25사(史)
중국은 역사를 국가에서 관리한다. ‘정사’는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현재 25사이다.
한(漢)나라의 사마 천(司馬遷)이 상고(上古)로부터 한나라 무제(武帝) 때까지 기록한 통사-《사기(史記)》로부터 시작한다. 이하는 단대사(斷代史)로서 1 왕조마다 1 부씩 사서(史書)가 만들어져 반고(班固)의 《전한서(前漢書)》,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를 합하여 사사(四史)라고 부른다. 이후의 왕조에 대해서는 《진서(晉書)》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진서(陳書)》 《위서(魏書)》 《북제서(北齊書)》 《주서(周書)》 《수서(隋書)》 《신당서(新唐書)》 《신오대사(新五代史)》가 만들어졌다. 남송(南宋)시대에 와서 《남사(南史)》 《북사(北史)》를 더하여 17사(史)로 총칭되었다. 원(元)나라 말기에 《송사(宋史)》 《요사(遼史)》 《금사(金史)》가 저술되었다. 명(明)나라 초 《원사(元史)》가 성립되었으므로 이들을 합하여 21사(史)로 칭한다. 청(淸)나라 초 만들어진 《명사(明史)》를 합하여 22사라고 하였다. 청나라 왕명성(王鳴盛)의 《17사 상각(商)》, 조익(趙翼)의 《22사 차기(箚記)》 등의 이름은 여기에 유래한다. 건륭제(乾隆帝)는 《구당서(舊唐書)》와 《구오대사(舊五代史)》를 편찬, 24사를 궁중의 무영전(武英殿)에서 간행했다. 도합 3,243권에 달한다. 마지막으로, 중화민국 초에는 커사오민의 《신원사(新元史)》가 정사로 추가되어 25사가 되었다. 청나라에 대해서는 민국 초에 《청사고(淸史稿)》가 나왔으나 아직 정사로서 권위 있는 ‘청사(淸史)’는 나와 있지 않다.
이처럼, 사마천은 역사에 길이 남는 불후의 역사가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신의 출생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오직 여러 문헌에 의하여 추측할 뿐이다.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기원전 153년,145년,135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문가들은 기원전 145년을 정설로 꼽고 있다.
고로, 사마천의 출생 시기는 지금부터 2160여 년 전, 전한(前漢) 경제(景帝) 중원(中元) 5년이다.
사마천의 생애를 살펴보자.
사마천은 평생 동안 ‘사기의 저작을 위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기는 곧 사마천의 평생 동안의 피와 땀, 눈물 그리고 한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사마천의 생애를 사기 저작이란 관점에서 볼 때, 대략 다음의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고찰해 볼 수 있다.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환관의 최고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 시키게 되는 56세까지의 시기이다.
아래에서 시기별로 나눠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1) 탄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사마천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용문(龍門 : 현재 韓城縣)시 하양(夏陽)에서 태사령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다. 사마는 성이고 이름은 천이다.
자(字)는 한자 문화권, 특히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성년이 되는 관례 때 부여받는 이름으로, 관명과 함께 부를 수 있도록 짓는 새로운 이름이다.
이는 이름이 부모가 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이나 스승, 왕(혹은 황제)외에는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관례 전까지 어릴 때 쓰던 이름인 아명(兒名)이 따로 있었다.
아버지는 사마담(司馬談)으로 태사령(太史令)의 벼슬을 했다.
태사령은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이다.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과 국가기록원장을 겸한 직책 정도로 볼 수 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으로 천문과 달력, 그리고 고전도 능하였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사마천이 7세 때 태사령(太史令)이 되어 무릉(武陵)에 거주하였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어린 시절부터 고전 문헌을 읽도록 가르쳤다.
사마천은 용문의 산간벽지에서 소를 치는 등 목축업을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마천은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 사마담 밑에서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하듯이, 사마담도 마찬가지로 교육에 열성적인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고전을 읽었고, 특히 역사에도 관심을 많이 가졌다.
아버지 사마담은 농사를 지으며 4살 때부터 사마천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10대 무렵에는 고문서를 읽을 정도의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사마 가문의 후손이었으나 다양한 인재들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선조들은 재상, 군사전략가, 유세가 등이 있었고 천문과 역법을 담당하던 관리도 있었으며, 시장을 관리하던 경제 전문가도 있을 만큼 다양했다.
아버지 사마담은 30여년간 한무제 밑에서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역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을 관리했다.
사관이란 원래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해야 하는 동시에 사실에 대한 비판자역할을 담당했다.
따라서, 사관이라는 존재는 자기 스스로의 직책에 대해 엄격한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사마담이 태사령이 되었을 당시, 사관의 지위는 이미 그 영예를 잃은 상태로, 오직 천문과 역법을 취급하는 기술직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사마담은 사관의 지위가 점차 기술직으로 천시되고 옛 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깊은 비애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서의 편찬을 계획했다.
사마담은 자신의 대를 잇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 사마천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이 13세(133년)무렵부터 고향에 돌아와 사마천을 데리고 황하와 위수 일대를 직접 돌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으로 하여금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현장답사를 하는 등 역사가로서의 자질과 지식을 쌓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래 사마담은 옛 사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사라져 버린 역사기록을 다시 찾아 현명한 임금과 충신과 의사 ‘명주현군(明主賢君)·충신의사(忠臣義士)’들의 발자취를 직접 찾아다니면서 밝히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마천은 20세(126년)경, 사마천은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아버지 권유로 천하를 답사하기 여행하기 시작했다.
약 2-3년간의 여행이었으나, 훗날 사기 집필에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마천은 이후 낭중(郎中), 즉 황제의 비서관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그는 전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각 지방의 특산물과 지리, 다양한 문화들을 몸소 체험하고 터득했다.
그 즈음,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하늘과 땅에 드리는 봉선제를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신도 당연히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사마담은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된다.
사마담은 탄식하며 낙담하여 결국은 화병을 얻어 죽게 되는 이 사건...
참고로 봉선이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이다.
봉선(封禪)은 제후들이 선(禪)을 통하여 천자(天子)로 부터 봉작(封爵)을 받는 것을 말한다.
봉작(封爵)은 천자(天子)가 제후들에게 봉선제(封禪祭)를 열고 각 제후들은 태산의 원구단(圓丘壇)에 모여 선(禪)을 행한 뒤 그 평가가 내려지고 선통(禪統)의 깊고 낮음에 따라 천자(天子)가 작위와 땅을 봉(封)해 주는 것을 봉작(封爵)이라고 한다.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사마천이 사기(史記)를 집필할 당시에는 '천하에 남아 있는 서적과 옛 기록이 빠짐없이 사관 앞으로 모여졌다.'고 《태사공자서》에서는 말한다.
우선, 사마천은 이것을 읽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이런 자료를 참고삼아 3천년 중국 통사를 썼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간혹 명주에 글을 쓰기는 했지
만 너무 비싸서 .기록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마천은 나무나 대나무를 약 가로 5센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로 길죽하게 잘라 만든 죽간이나 목간을 사용했다.
사마천이 총 130권, 526,500자를 쓴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는 궁형을 당한 뒤에야 사기를 완성한다.
궁형을 받은 뒤, 그는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게 된다.
무엇이 바른 역사인가?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
그는 결국 역사관이 변하여, 명분을 좇기보다는 실질적인, 그의 눈에 비친 실제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특히, 궁형 이후에 사마천이 입명양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는 궁형으로 인한 자신의 불효를 씻고 입신양명(立身揚名)으로 가장 큰 효를 실천하려 했다.
또한, 궁형을 계기로 인간의 도덕과 현실적인 화복의 문제는 물론 타인의 명성에도 큰 관심을 갖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사마천은 ‘덕을 행하는 것과 부귀 권세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며 사람은 누구나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으면 족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마천은 결국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성취한 인물의 명성을 사기를 통해 전하는 것을 임무’로 설정한다.
그는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대저서 《사기》의 완성을 이룩한다.
2. 왜 사기인가?
왜 사마천의 사기인가?
사기는 중국고대 한나라 시대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이다.
이 책은 중국인의 공통시조 황제로부터 사마천이 살았던 당시 한무제에 이르는 3천 여년을 기록한 중국 최초의 통사이다.
사기 이전의 역사기록은 단편적 사실기록이나 간략한 연대기적 서술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마천은 수많은 문헌고증과 기행을 통해 자신의 역사관을 투영한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역사기술 형태 - 즉 기전체를 창안했다.
중국의 역사는 국가에서 관장하는데, 이후의 24정사 모두 사마천이 창안한 기전체로 기술되어 있다.
사기가 왜 중요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기는 진나라 진시황의 분서갱유이후, 중국의 불타 없어진 고대사를 복원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사기는 객관적인 서술이 생명인 역사서에서 진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이 가미된 감정을 이입시킨다. 결국 문사철이 가미된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에 이르기까지 기니긴 기간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의 메아리를 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 앞에서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마천의 경우 절대권력 앞에서 양심을 굽히지 않은 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궁형에 처해졌던 ‘꼿꼿한 표상’으로 역사 속에 길이 남아있다.
사마천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을 사기 저술로 승화시켜 역사상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안위를 주는 것은 물론 지주가 되고 있다.
보통 역사는 승자편이라고들 한다.
또한 역사는 승자들의 이야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사마천은 예외다.
사마천은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되새기며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꿔, 보편적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진섭같은 머슴도 제후의 반열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보통사람들도 사기를 읽고 동일시하면서 인생의 의미, 처세의 태도, 인간관계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곤 했다.
사기를 읽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太史公曰:餘述歷黃帝以來至太初而訖,百三十篇.”
"나는 황제(黃帝)로부터 태초(太初)에 이르기까지의 사실(史實)을 역술(述歷)하였으니, 이는 모두 130편이다." <사기> 태사공자서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의 5파트로 구성된 기전체 역사서이다.
본기는 황제에 관한 기록이다.
표는 연표, 서는 국가 제도와 문물에 관한 전문적 논문, 세가는 황제를 보필했던 제후에 관한 기록이다.
열전은 사기의 백미로 모든 사람에 관한 기록이다.
열전 70권 가운데 맨 마지막은 태사공자서로 사마천 자신의 가계와 사기의 나머지 129권에 대한 요약이 주된 내용이다.
사기의 특징을 살펴보자.
① 인물중심의 역사서술 체제를 취하여 당시의 사회생활과 정치사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자 하였다.
② 인류사회의 역사를 신(神, 天)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의 역사임을 주지하고 인간의 역할을 중시했다.
③ 역사의 변화나 인간사의 성패를 당시의 신학사관에서 벗어나 그 원인을 사회구조, 특히 경제적 시각에서 재해석했다.
사마천의 사기저술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인가?
1) 구천인지제(究天人之除) :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2)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찰한다.
3) 술왕사지래자(述往事知來者) :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을 알게 한다.
4)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 : 일가의 문장을 이룬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문화적 사상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관과 입장을 완성한다.
특히, 그는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에서 그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이에는 다음 세 가지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첫째, 선구적인고 창의적인 능력가로서 학설을 이루어냈다.
둘째, 백가 중 일가(一家), 사가(史家)로서의 학업을 성취했다.
셋째, 사가가 이룬 학업은 종합적이다.
이런 세 가지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성일가지언(誠一家之言)》은 사기의 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한 결정체적 성어라고 할 수 있다.
사기는 재미는 물론 진한 감동까지 느껴진다.
작은 이익에 흔들려 친구를 쉽게 배신하고, 신의를 쉽게 저버리는 오늘날의 세태를 비웃기라도 하듯 신의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예양과 형가 같은 이들의 이야기는 진한 감동을 준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려주는 진퇴의 지혜가 있다.
어디 이뿐이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다.
부당하게 핍박당하거나 희생당한 뒤 발분하여 통쾌하게 복수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다양한 사람들, 별별 인간 군상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의 처지에 대입시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자기 스스로 노력해서 얻지 않은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자세이다.
‘열심히 돈 벌어 부자 되세요, 직업에 귀천이 없다’ 등의 실용적인 직업관, 윤리관이 담겨있다.
세태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틔울만한 풍자가 있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어떻게 빠져나가는지를 지켜보면 그 고상함과 지혜에서 오늘날의 코메디를 능가한다.
돈과 관련된 화식열전의 한 구절을 보자.
"보통 사람은 자기보다 열 배의 부자에 대해서는 욕을 하고, 백 배가 되면 무서워하고, 천 배가 되면 그 사람 일을 해 주고, 만배가 되면 그 사람의 노예가 된다.“
그야말로 2천년전이나 오늘날이나 세태가 같은 것을 보면, 한구절, 한구절이 인간들의 군상을 담은 역사의 축소판이며, 그야말로 명언 중 명언이다.
제3편 사기열전
54. 동월열전(東越列傳)
1) 개관
동월은 남월의 동쪽으로 민월이라고도 한다.
월왕 구천의 후손으로 한나라 때 무저를 민월왕에 봉하고, 요를 동해왕에 봉했던 두 사람이 다스린 지역이다.
지금의 복건성 지방이다.
2) 등장인물소개
(1) 민월왕 무저(閩越王 無諸)와 동해왕 요(東海王 搖)
민월왕(閩越王) 무저(無諸)와 동해왕 요는 진(秦)의 천하통일 시 그들의 왕위를 폐하여 군장(君長)으로 삼고 그 땅을 민중군(閩中郡)에 속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로 성은 추씨(騶氏)다.
이후,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저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파양(鄱陽) 현령 오예(吳芮)에게 귀순했다.
3) 고사성어(생략)
4) 동월열전(東越列傳) 전문
吳之叛逆(오지반역), 오나라가 반역을 일으키자
甌人斬濞(와인참비), 구인들은 오왕 비의 머리를 베어 한나라에 바쳐
葆守封禺爲臣(보수봉우위신), 그 공으로 우산(禺山)에 봉해져 사직을 지키고 한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作<東越列傳>第五十四(작<동월열전>제오십사) 이에 <동월열전> 제오십사를 지었다.
민월왕(閩越王) 무저(無諸)와 월나라의 동해왕(東海王) 요(搖)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로 성은 추씨(騶氏)다.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왕위를 폐하여 군장(君長)으로 삼고 그 땅을 민중군(閩中郡)에 속하게 만들었다.
그 뒤 제후들이 진나라에 반기를 들자, 무저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파양(鄱陽) 현령 오예(吳芮)에게 귀순했다.
오예는 파군(鄱君)으로 불리웠는데 제후들이 진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종군하여 도왔다. 그때 제후들을 호령하고 있던 항우가 무저와 요를 왕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도 초나라를 따르지 않았다.
한나라가 항우를 공격하자 무저와 요는 월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한나라를 도왔다.
한고조 5년 기원전 202년, 무저를 민월왕으로 삼아 민중의 옛 땅을 다스리게 하고 동야(東冶)를 도읍으로 정했다.
효혜제(孝惠帝) 3년 기원전 192년, 고제(高帝)을 위해 월나라가 세운 공적을 열거하고 말했다.
“민군(閩君) 요는 공로가 많으며, 그의 백성들은 그를 좋아하여 잘 따른다.”
그리고 요를 세워 동해왕(東海王)으로 삼고 동구(東甌)에 도읍을 정하게 했다.
세상에서는 그를 동구왕(東甌王)이라 불렀다.
그로부터 여러 대를 지나 효경제(孝景帝) 3년 즉 기원전 154년에 이르렀을 때, 오왕(吳王) 유비(劉濞)가 반란을 일으켜 민월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민월은 따르지 않았고. 동구만이 오나라를 따랐다.
그러나 오나라가 멸망할 때, 동구는 한나라가 현상금을 내건 오왕을 단도(丹徒)로 유인하여 죽였다.
이 때문에 동구 사람들은 죽음을 모면하고 자기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다.
민월로 달아난 오왕의 아들 자구(子駒)는 그의 아버지를 죽인 동구에 원한을 품고 항상 민월에게 동구를 치라고 권유했다.
건원(建元) 3년은 한무제 3년에 기원전 138년이다.
이 해에 이르러 민월은 군사를 일으켜 동구를 포위했다.
식량이 떨어져 곤궁한 처지에 놓인 동구가 항복할 지경에 이르자 급히 천자에게 사신을 보내 고했다.
천자가 그에 대한 처리를 태위(太尉) 전분(田蚡)에게 묻자, 전분이 대답했다.
“월인들이 서로 공격하여 싸우는 것은 본래부터 흔히 있던 일이며, 또 자주 배반과 귀순을 일삼습니다. 그러므로 중국을 번거롭게 하면서까지 가서 도울 필요는 없습니다. 진(秦)나라도 그들을 내버려둔 채 굳이 귀속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중대부 장조(莊助)가 전분을 힐책하며 말했다.
“힘으로 월나라를 도울 수 없고, 덕으로 월나라를 덮을 수 없음을 걱정일 뿐입니다. 만일 참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엇 때문에 버려두겠습니까? 진나라는 함양(咸陽)조차도 버렸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월나라야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작은 나라가 궁지에 빠져 천자께 달려와 위급함을 알렸는데, 천자께서 구원하지 않으면 그들은 어느 곳으로 가서 호소해야 합니까? 또 어떻게 모든 나라를 자식처럼 여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천자가 말했다.
“태위는 함께 의논할 상대가 못되오. 나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으므로 호부(虎符)를 내어 군(郡)과 국(國)에서 군사를 징발하고 싶지 않소.”
(호부(虎符): 호랑이 모양의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符)로 군사 이동 등에 사용되었다. 이것을 둘로 나누어 오른쪽은 황제가 왼쪽은 군사 통솔자가 지녔다가 합쳐보아 일치하면 병사를 일으키는 증거가 되었다.)
그리고는 장조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회계군(會稽郡)으로 가서 군사를 징발하여 동구를 돕게 했다.
그러나 회계 태수는 호부(虎符)가 없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군사를 내주려고 하지 않았다.
장조는 사마(司馬)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천자의 명을 밝힌 뒤에야 마침내 군사를 내어 바다를 건너 동구(東甌)를 구원하러 갈 수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민월(閩越)은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동구는 나라를 들어 중국으로 옮겨 올 것을 청한 뒤 백성들을 이끌고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로 와서 살았다.
건원 6년에 이르러 민월이 남월을 쳤다.
남월은 천자와의 약속을 지켜 감히 제멋대로 군사를 동원하지 않고 천자에게 고했다.
천자는 대행(代行) 왕회(王恢)를 예장(豫章)으로 나가게 하고, 대농(大農 한안국(韓安國)을 회계(會稽)로 나가게 하여 모두 장군으로 삼았다.
한나라 군대가 양산령(陽山嶺)을 넘기 전에 민월왕 영(郢)이 군사를 보내 험한 곳에서 맞서 지키고 있었다.
이때 민월왕의 아우 여선(餘善)이 재상 및 종족들과 의논하여 이렇게 말했다.
“우리 왕은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켜 남월을 치면서 천자에게 주청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자의 군사가 우리나라를 치려고 왔다. 지금 한나라 군사는 많고 강하다. 지금 요행히 이긴다 해도 앞으로 더욱 더 많은 군사가 쳐들어와서 결국 우리나라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지금 왕을 죽여 사죄하여 천자가 듣고 군사를 멈추면, 나라는 그대로 무사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천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때 가서 힘껏 싸우고 이기지 못하면 바다로 도망쳐 들어가자.”
모든 사람들은 말했다.
“좋습니다.”
그들은 즉시 왕을 창으로 찔러 죽인 뒤, 사신을 보내 그 머리를 대행에게 바쳤다.
대행은 말했다.
“우리가 온 목적은 민월왕을 베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민월왕의 머리를 보내 사죄를 하였으니 싸우지 않고도 해결되었다. 이보다 더 큰 이익은 없다.”
그래서 군대의 행군을 멈추고 대농 한안국에게 통보하는 한편, 사람을 시켜 민월왕의 머리를 가지고 말을 달려 천자에게 보고했다.
천자는 조서를 내려 두 장군의 토벌을 멈추게 하고 이렇게 말했다.
“영(郢) 등이 반란의 원흉이다. 그러나 무제의 손자 요군(繇君) 축(丑)만은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
천자가 즉시 낭중장(郎中將)에게 명을 내려 축을 월나라의 요왕(繇王)으로 세워 민월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영을 죽인 여선의 위엄과 명령이 나라 안에서 행해지자 많은 백성들이 그를 추종했다.
여선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왕이 될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요왕은 여선의 무리들을 휘어잡아 바로잡을 수 없었다.
천자 역시 이 소식을 들었으나, 여선 때문에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선은 영과 함께 자주 반란을 모의하기는 했지만, 뒤에 앞장서서 영을 베었기 때문에 한나라 군사가 수고스럽게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는 여선을 동월왕으로 세워 요왕과 병립하게 했다.
원정(元鼎) 5년 기원전 112년에 이르러 남월이 모반을 하자, 동월왕 여선은 글을 올려 군사 8,000명을 이끌고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따라 종군하여 여가(呂嘉) 등을 치겠다고 청했다.
여선의 군대가 게양(揭陽)에 이르렀을 때, 바다에 풍랑이 심하다는 구실로 더 나아가지 않고, 두 마음을 갖고 몰래 남월로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나라 군사가 파우(番禺)를 깨뜨릴 때까지 당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누선장군이 사람을 경사로 보내 글을 올려 군사들의 방향을 돌려 동월을 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천자는 사졸들이 지쳐있다고 생각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군사를 해산시키고 교위들을 예장군(豫章郡)의 매령(梅嶺)에 주둔시켜 천자의 명령을 기다리도록 했다.
원정 6년 가을, 여선은 누선장군이 자기를 죽일 것을 요청했으며, 한나라 군사가 국경까지 와서 곧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모반을 일으켰다.
그리고 군대를 보내 한나라 군사의 길을 막고, 장군 추력(騶力) 등을 탄한장군(呑漢將軍)이라 부르며, 백사(白沙)ㆍ무림(武林)ㆍ매령으로 쳐들어가게 하여 한나라의 교위 세 명을 죽였다.
이때 한나라는 대농(大農) 장성(長成)과 산주후(山州候)였던 치(齒)를 주둔군의 장군으로 삼았지만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오히려 안전한 곳으로 물러났다.
때문에 이들은 둘 다‘겁이 많아 적을 두려워한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여선은‘무제’라는 옥새(玉璽)를 새겨 스스로 서서 그 백성들을 속이고 망언을 일삼았다.
천자는 횡해장군(橫海將軍) 한열(韓說)을 보내 구장(句章)에서 출격하여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부터 나아가게 하고, 누선장군 양복에게는 무림(武林)에서, 중위 왕온서(王溫舒)에게는 매령으로부터, 월후(越侯) 엄(嚴)과 갑(甲) 두 사람은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으로 각각 삼아 약야(若耶)와 백사(白沙)로부터 출격하게 했다.
원봉(元封) 원년 기원전 110년, 겨울에 이들은 다 같이 동월로 들어갔다. 동월은 미리부터 군대를 보내 험한 곳을 지키고 순북장군(徇北將軍)에게 무림(武林)을 지키게 하고 누선장군의 교위(校尉) 몇 명을 패주시키고 장리(長吏)를 죽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누선장군의 부하인 전당(錢唐) 출신의 원종고(轅終古)가 그의 부속군을 이끌고 순북장군을 베어 죽여 그 공으로 어아후(禦兒侯)가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한나라 본대가 당도하기 전에 일어났다.
한나라 조정은 당시 강회지간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었던 월나라 출신의 연후(衍侯) 오양(吳陽)을 월나라에 들여보내 여선을 타이르게 했다.
그러나 여선은 그것을 받아들이기 않았다.
횡해장군(橫海將軍)이 먼저 도착하자 연후 오양은 자기 고향 사람 700명을 거느리고 한양(漢陽)에서 월나라 군사를 공격했다.
그리고 건성후(建成侯) 오(敖)를 따라 그의 무리들과 함께 요왕(繇王) 거고(居股)에게로 가서 모의했다.
“여선은 원흉으로 우리를 위협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 지금 한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수도 많고 강합니다. 여선을 죽이고 스스로 한나라 장군들에게 귀순하면 다행히 죽음은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양의 무리는 드디어 여선을 죽인 후 부하들을 인솔하여 횡해장군에게 항복했다.
그로 인해 요왕 거고를 동성후(東成侯)로 봉하여 만호후(萬戶侯)가 되게 하고, 건성후 오를 개릉후(開陵侯)에 봉했으며, 월나라의 연후 오양을 북석후(北石侯)에 봉했다.
또 횡해장군 한열을 안도후(案道侯)에, 횡해교위(橫海校尉) 복(福)을 요앵후(繚嫈侯)에 봉했다.
복은 성양(成陽) 공왕(共王)의 아들로서 원래는 해상후(海常侯)였는데, 법을 어겨 후의 지위를 잃었다.
그는 원래 종군하여 군공을 세우지 못했으나 종실이라는 이유로 후로 봉해진 것이다.
여러 장수들도 모두 군공을 세우지 못해 후로 봉해진 사람이 없었다.
동월의 장수 다군(多軍)은 한나라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자기 군대를 버리고 항복했으므로 무석후(無錫侯)에 봉해졌다.
천자는 이렇게 말했다.
“동월은 좁고 험한 곳이 많으며, 민월은 사람들이 사나워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이 많다.”
군리에게 조서를 내려 그곳 백성들을 모두 장강과 회수 사이로 옮겨 살게 했다.
그리하여 동월 땅은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태사공이 말한다.
“월나라는 만이(蠻夷)의 나라이긴 하나 그들 조상은 백성들에게 큰 공덕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 오래도록 나라를 유지했겠는가! 여러 대를 지나오면서 언제나 군왕으로 있었고, 구천(句踐)은 한 차례 패자로 일컬어졌다. 그렇지만 여선에 이르러서 대역을 저질러 나라는 멸망하고 백성들은 옮겨 살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조상의 자손인 요왕(繇王) 거고(居股) 등은 오히려 만호후에 봉해졌다. 이것으로 월나라가 대대로 공후가 될 수 있었음은 우(禹)임금이 남긴 공덕 때문임을 알 수 있다.”
55. 조선열전(朝鮮列傳)
1) 개관
그림 한나라와 위만 조선(출처: 구글)
여기서 말하는 조선은 '고조선'이긴 하지만 특히 '위만조선'을 지칭한다.
한 무제는 국가가 강성해져 중국 주변의 다른 민족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뿐만이 아니라 중국 주변의 있던 다른 민족들에게도 행하여 졌다.
이런 근거는 흉노열전(匈奴列傳),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남월열전(南越列傳), 동월열전(東越列傳)에 잘 나타나있다.
기원전 108년 한의 침략당시, 조선의 왕 우거는 한 황실에 입조하지 않고, 진번 주위의 나라들과 한나라와의 관계를 방해하였다.
이에 한 무제가 섭하(涉何)를 보냈지만 우거는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섭하는 돌아오는 길에 배웅 나온 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한나라로 돌아갔다. 이에 한 무제는 섭하를 요동의 동부도위로 임명하지만 원망을 품은 조선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섭하를 죽이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 무제가 조선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게 된 원인이다.
한무제는 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돌아온 섭하를 조선과 근접한 국경으로 보냈다.
이는 조선의 도발을 유도한 것이었다.
조선이 반발하자 한무제는 군사를 일으켜 조선 침략에 나섰다.
조선을 침략하기로 결정한 무제는 원봉(元封) 2년 가을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에게 군사 오만 명을 주어 바다를 건너보내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로 하여금 요동을 나와 우거를 치게 하였다.
허나 한나라의 공격은 조선의 저항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전쟁이 지지부진하자 한 무제는 위산을 보내어 군세를 과시하면서 조선에게 항복을 권하였다.
이에 조선의 왕이 항복의 뜻을 내 비쳐 좌장군과의 만남을 주선하지만 서로 의심한 나머지 해서 성사되지 못하고 위산은 한 무제의 노여움을 사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윽고 좌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왕검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누선은 섣불리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조선의 대신들이 누선에게 항복을 뜻하는 말을 전하려고 하였다.
좌장군은 누선에게 함께 조선을 공격하자고 하였지만 누선은 그에 호응하지 않았고, 이에 좌장군과 누선의 사이는 그리 좋지 못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군사를 이끌고 맞서 싸워서 한나라에 대항하였다기보다는 계략으로서 한나라의 침략을 저지하였다.
이런 계략은 계속해서 침략을 시도했던 좌장군에게 군권이 집중되면서 더 이상 통하기가 힘들게 되었다.
결국 조선스스로 내부분열이 일어나 한나라에 의해 망하게 된다.
좌장군은 이미 두 군대를 병합하여 즉시 급히 조선을 공격하였다.
이에 조선의 대신들은 도망하여 한나라에 항복하고 성에 남아있던 신하가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하지만 우거의 신하인 성사(成巳)가 왕검성을 내어주지 않고 저항하자 한으로 도망친 신하의 아들과 우거의 아들이 성사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였다.
한 무제는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여 그 지역을 다스렸다.
전쟁에서 돌아온 좌장군은 공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고 계책을 어긋나게 하였다고 하여 죽임을 당하고 누선역시 죄가 있었지만 돈으로 용서를 받고 평민이 되었다.
태사공은 말하였다.
“조선과의 전쟁에 있어서 장수 가운데 후(侯)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무제는 왕검성 점령에 온힘을 집중했다.
그 결과 한무제는 왕검성을 함락하고 위만조선을 무너뜨렸지만 그 영향력이 조선의 모든 중소국가들에게 까지 미치진 못하였다.
이런 결과가 바로 반쪽짜리 승리, 실패한 전쟁으로 나타나고 사군을 설치하지만 중앙의 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후 연맹체에서 분리되어 나온 많은 국가들이 독립하게 되고 한 동안 많은 국가들이 난립하다가 고구려의 등장과 함께 정복당하거나 흡수되어 중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렇게 실패한 전쟁이었음을 사마천(司馬遷)은 아무도 포상 받은 이가 없었다는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한 무제 때 설치된 한사군에 대한 평가는 더 이후에나 이뤄지기 때문에 사마천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에 이기고도 상은 받은 이가 아무도 없다는 말을 통해 사마천은 전쟁의 결과를 사실그대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승리하였지만 얻은 것은 없는 전쟁’
사마천은 한나라와 조선의 전쟁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
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사마천의 사기시리즈 제1권)(키메이커)
사마천의 사기열전(제1권-제4권, 총4권)(키메이커)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키메이커)
성공의 기술(지구문화사)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성장종말(지구문화사)
금융옵션(박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