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에세이
인생은 단 한 번 뿐인 긴 여행이다.

인생은 단 한 번 뿐인 긴 여행이다.

지은이 : 김소구
출간일 : 2024-06-21
판매가 : 20,000원
포멧 : PDF
판매서점

책소개

프롤로그
아무리 길이 험악하고 잠자리가 누추해도 계속가야하는 여행이 인생이다. 누구에게나 세상을 살다보면 행복할 때와 어려운시련이 있을수 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도중에 인생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면 삶의 목표를 성취했다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과학자로 살면서 발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기 위해서 이글을 쓴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인 긴 여행이다“를 쓰면서 나는 많은 어려움에 도전하고 성취하는 행복을 이야기 할려고 한다. 만약 내가 꽃길만 걸었다면 그러한 행복을 맛볼 수 있었을까? 인생은 여러 종류의 길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떤 길을 택하여 살아가느냐에 달렸다. 물론 재물과 귀족출생에서 출발한 행운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자기를 솔직하게 전부 보여주는 것은 다음 세대들한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위한 것이다. 물론 자신을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결점과 부족한 면도 있다. 때로는 불편했던 누군가와의 관계를 표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배들에게 삶의 지혜를 조금이나마 배우게 하는데 있다. 누군가는 결코 자신과 같은 길을 가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이 책을 집필한 이유 중 또 하나는 결국인생은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집념하면 성취를 할수 있고 행복과 보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과학자로 살면서 발견한 것을 다음세대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더욱이 온갖 산전수전을 경험하면서 배운 지혜와 치열한 경쟁속에서 터득한지식을 바탕으로 거짓과 진실을 밝히는것이 한 인간의 보람과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대표적 예가 신의 존재와 천안함침몰의 미스테리를 밝히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말과같이 나는 어려운 시기와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냈지만 나에게는 항상 푸른 꿈이 있었기 때문에 행복했었다. 나는 파란만장한 영화 같은 삶을 살았지만 늘 긍정적이었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며 살았다. 북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년 때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매일 퍼붓는 미군폭격과 전염병으로 거의 죽었다가 살아났다. 북쪽으로 떠나는 피난길 도중에 운 좋게도 남쪽을 택해서 도랑 따라 도망해 온 곳이 남한이었다. 피난민 수용소와 낯선 남한 땅에서 타향살이 설음과 가난의 어려운 생활을 보내야했다. 전쟁 때문에 오래 동안 학교를 떠난 나로서는 자유롭게 학교에 다니는 남한의 학생들이 부러웠다. 운좋게도 피난민 학교에서 시작에서 남한의 정규국민학교로 전학해서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어려운 피난민학교에서 학생회장을 거치면서 많은 학생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는 리더로 성장했다.
가난했지만 재미있고 행복했었다.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서울고에 합격해서 첫번째 자신감과 자부심을 경험했다. 당시 나는 서울중학교가 아닌 타교에서 서울고로 진학한 이른바 ‘타교생’이었다. 그래서 더 당당해지려 애썼던것 같다.
대학은 자유와 방종을 만끽하는 일반 대학보다 실력과 정의를 생명으로 하는 해군사관학교 와 육군사관학교를 다녀보았다. 여기서 ‘다녀 보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곳이 내가 평생을 바칠 나의 길이 아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곳도 아니라는 생각으로 인생진로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한대의 내 꿈을 펼쳐볼 그림을 그려보았다. 항상 높은 이상과 무한한 꿈이 있었으며 내가 이룰 수 있는 미래를 상상 하면서 세상에 꼭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주변에서는 출세와 권력의 지름길을 찾을 수 있다는 법대를 종용했지만 이 또한 나의 길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결국의 선택은 신앙적 진리와 지식을 추구하고 학사규정이 엄격한 서강대학 물리학과였다. 한술 더 떠 세계 최고가 모여 경쟁하는 미국으로 유학해 자연과학(물리)분야을 전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서강대학 2년을 마치고 미국유학을 시도했으나 경제사정이 허락지 않아 2년을 더 버텨야 했다. 결국 졸업을 하고서야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대재벌 그룹의 유명기업에 입사할 기회도 있었지만 재물이 나의 꿈은 아니었다.
서강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면서 내가 이 분야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리학을 이용한 응용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리건주립대학 (OSU) 물리학과 대학원에 입학했지만 해양학과전과하여 지구물리학 분야에 전념할수 있었던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남다른 관심과 집념 탓에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박사학위를 따냈다. 뿌듯한 성취감에서 나는 자신감의 행복을 경험했다.
미국유학시절 5년 동안 계속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미국문화와 미국인들의 특성을 잘 알게 되었다. 또한 며칠씩 밤을 새며 공부하면서 무서우리만치 노력하는 나의 룸메이트 일본 학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배운 것도 많았다. 미국에 도착한 뒤 첫 여름방학 때는 오리건(Oregon)주 코발리스(Corvallis) 시골 농장 콩밭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석사과정을 마친 후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공장노동, 어부, 부동산중개업, 식당, 보석상, 택시운전사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미국을 더 깊이 알게 되었다 내가 비영주권자이지만 박사학위를 받기 한 달 전쯤에 오클라마주 툴사(Tulsa)의 한 석유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를 받아들여 선임지진파 분석가(Sr. Seismic Analyst)로 취직하니 마침내 미국에 정착해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또한 길지는 않았다. 조국의 부름 때문이었다. 미국생활을 접고 초빙유치 과학자로 귀국의 길을 택한 것이다.
내가 학위를 마치고 입사한 석유회사는 재미도 있었지만 내가 평생을 몸 둘 곳이 아니라는 것은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나의 프로젝트가 80% 밖에 완성되지 않았지만 회사는 내 작품을 상품화하고 내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다. 회사는 정확하고 완벽한 것 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했다. 이것은 지식을 재물과 권력보다 우선에 두는 나의 철학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럴 때 마침 나를 필요로 한다는 한국정부 박정희 대통령의 뜻이 전달됐다. ‘외국 고급과학기술인 유치 프로그램’에 의해서 지진학박사 1호로 초빙되어 금의환향한 것이다. 귀국 후 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전에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왔다. 운 좋게도 한국의 한 대학에서 물리학 부교수로 초빙해 교수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우리 대학에서는 우리나라 지진연구의 선구자로서 국내지진연구에 관한 수많은 과제를 수행했다. 해외의 많은 석학과 공동연구는 물론 우수한 해외 연구원과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구물리학과 지진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제학회에 참가하고 해외초빙교수로 세계 여러 나라 연구기관에서 학술활동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세계 여러 나라를 방문하거나 또한 장기간 거주하면서 현지인들과 접촉하고 국제공동연구를 하는 동안 외국문화를 많이 경험하고 배운 것 또한 내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장미빛 인생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참 잘 나갈 때 몽고국립대학 유학생에서 일이 터졌다. 지구물리학 박사학위 3년차 대학원생이 실험실 화재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피해가족과 학교 측 쌍방이 내게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고통과 불이익에 대한 호소를 감내해야 하는 어려운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도의적 죄책감 외에는 책임질 일은 아니어서 끝까지 편하게 교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되었다.
내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여름방학동안 잠시 택시운전수를 할 때 난감한 일이 생겨 하느님을 찾아야 했다. 벽을 쳐다보고 기도를 했던가 싶은데 난생 처음으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다. 환청이었을 것이다. “걱정하지마라, 모든 것은 잘 될 것이다”. 매우 회망적인 메세지를 환각처럼 들은 후 신기하게도 모든 것이 잘 해결된 것이다. 지진학분야에서 유명한 예수회 계통의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연구조교 장학금통지서를 보내왔고 이어 가을학기부터 박사과정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성직자를 만나게 되고 이 때문에 카톨릭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나는 매일 하느님과 함께 생활하며 찬양하는 열열한 신자가 됐다. 한국정부의 초청을 받았을 때 다시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던 나의 초심을 바꾸게 만든 것도 기도에서 나온 하느님의 응답이었다. 오클라호마 털사에서 퇴근할 때 마다 공원에 들러 기도할 때 갑자기 “그들은 당신이 필요하다(They need you)“는 환청이 들렸다. 이로부터 유치과학자초청을 승락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인생은 모든 것이 하느님과 함께 50대 후반까지 진행 되었다. 그 후 나는 하느님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성경을 비롯해 많은 고대문헌과 종교 및 철학서적에 골몰하면서 더 깊이 과학철학을 연구할 수있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한동안 아주 진실한 가톨릭신자였지만 지식이 늘어갈수록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특히 나의 분야 물리학, 지구물리, 해양학, 지진학 등의 자연법칙에 집념하면서 전문지식이 축적된 것이다. 국제학회 또는 공동연구로 여러 나라에 체재하면서 해외의 많은 석학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세상을 더 넓게 알게 되었다. 그밖에도 국제학술지에 논문과 저술을 발표하면서 한 과학자의 집념과 발견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문학적 또는 종교적 철학관에서 새로운 과학적 철학을 발견했다할 것이다.
이를 기초로 기존의 철학과 종교적 관점에서 신이란 어떤 존재 인가를 자연법칙 관점에서연구하기 시작 했다. 내가 과학자의 길을 가면서 발견한 것은 신이란 절대적 필연적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이란 인간이 과학적 집념에서 찾을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법칙을 믿고 자연원리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자연주의론자 (Naturalist)가 될 것을 제안한다. 나는 주관적인 신앙보다 객관적인 자연법칙에만 절대적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이것은 고전물리학은 물론 현대물리학에서 통계적인 양자역학과 곡면좌표의 상대성이론을 포함한다.
나는 과학과 철학, 과학과 종교, 그리고 인생과 자연을 배우면서 살아온 경험을 세상에 이야기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과학과 철학, 종교와 우주(자연)는 모두 하나의 진리로 통하기 때문이다. 우주는 물질(matter)과 에너지(energy)의 합성으로 되어있다. 물질은 물체(substance)이고 에너지는 물체를 움직이는자(mover)이다. 물체는 우리가 보고, 냄새맡고 만질수있는 재료 또는 자료(stuff)이다. 그것은 질량과 공간을 차지한다. 반면에 에너지는 추상(abstract)으로 볼수 없고 냄새도 맡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형태이다. 물질은 에너지로 항상 변환할 수 있고 아이슈타인의 에너지-질량등가법칙(E= mc^2)에서 물질과 에너지는 같다. 또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은 물리학적으로 힘과 거리(시간)가 작용했기 때문에 일(work)을 할수 있다는 뜻이다(force x distance = work). 즉 에너지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의 자산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물질과 에너지의 관계처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이원론을 주장하는 신앙 보다 하나로 보는 일원론에서 무게를 싣고 싶다. 눈에 안 보이는 영혼은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 항상 함께 존재한다. 그러므로 육체를 떠나서 돌아다니며 눈에 안 보이는 귀신(ghost)이나 신(God)은 이원론적 사고방식에서 나왔고 다만 의식(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불확실한 세계 속에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천국을 동경하며 눈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신에 의존하며 살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보잘 것 없고 절망적인 존재가 될 지라도,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고 또한 그렇게 해주기를 기도한다고 기독교인은 믿는다. 기적과 신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과 육체 관계는 물질과 에너지와 같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를 생각해 보라. 모든 생물은 물질과 에너지 (동작)로 되어있지만 무생물에는 물질만있다. 고전물리학에서 열역학의 제1법칙에 의하면 에너지는 생성도 파괴도 되지 않는다. 즉 어떤 시스템에서 얻거나 잃은 에너지양은 전달된 에너지양과 같다는 고정관념에서 열에너지는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찬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바꿀수 있게 되었다. 즉 찬 물체에서 더운 물체로 열은 흐르지 않는다는 열역학의 제2법칙을 위반할 수 있다. 그러나 에너지를 마구 쓰면 고질에너지에서 저질에너지로 변환하면서 질서가 무질서로 변환한다. 이 무질서의 양의 엔트로피(entropy)는 일상생활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인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자연의 법칙대로 살면 엔트로피가 거의 일정하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는 붕괴되지 않는다. 따라서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감염병은 물론 이상기후와 세계 곳곳에 일어나는 전쟁과 불행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영리하면서 어리석음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있다. 불편했지만 건강했던 옛날의 자연환경을 동경한다. 나는 불편했지만 건강했던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는 자연주의론(Naturalism)을 재차 강조한다.
불교철학은 일종의 자연주의론에 가깝다. 불교는 동기(Motive)를 대상으로 하지만 기독교는 오르지 결과(Result)를 대상으로 한다. 즉 오늘날 서양문화와 자본주의 기본을 이끌고 있는 기독교문화는 귀납적 방법에 역점을 두지만 전통적으로 동양문화의 불교는 명상과 자비를 가지고 온갖 만물을 깨닫고 화합하는 연역적방법에 기초한 연기의 법칙이기 때문에 과학적 이라고 볼 수 있다. 나도 젊었을 때 서너달 사찰에 머물면서 스님들과 깊은 논쟁을 한적 있다. 그러나 불교는 오랜 세월 동안 변화와 진화가 거의 없고 체계적인 지식발전이 정체해 있을 뿐만 아니라 환생과 극락세계는 현대 과학자로서는 동의하기 매우 어렵다. 미래의 제3세대 종교로 자연의 법칙(Law of Nature)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미래 자연종교, 즉 자연주의론(Naturalism)을 제안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연법칙대로 살아가면 자연의 질서를 지켜 엔트로피의 증가를 최소화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지진. 태풍, 허리케인 및 홍수 같은 자연재앙으로 인간들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지만 이제는 예고없이 찾아오는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희귀한 판데믹 감염병이나 우크라이나-러시아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처럼 세계각지에서 발생하는 민족전쟁, 각종범죄와 사고로 발생하는 인간재앙으로 지구가 종말로 가고있다. 이것은 물질문명에서 온 우리의 탐욕 때문이다. 아주 오랜 옛날 우리조상들은 태양과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는 것은 물론 지진같은 자연의 재앙을 겪어가면서 인간의 운명과 미래를 겸손히 받아들이고 예언도 했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법칙을 준수하면서 살아가는 자연주의론자가 될 때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대유행병도 없는 세상의 평화를 얻게 될 것이다. 몇해전만 해도 등산하면서 야생화와 벌과 나비를 만나고 산딸기와 버찌를 따먹었지만 지금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섭취하는 모든 과일과 채소도 대부분 비닐하우스 안에서 인공적으로 재배된다. 우리가 억지로 만든 식품을 매일 먹고 있다면 우리의 면역체계는 어떻게 될까?
내가 인생에서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나의적성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과학자로 평생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중의 또하나는 과학자의 집념으로 종교처럼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것을 믿고 떠돌아다는 천안함 침몰원인의 물증을 정확하게 발견해서 국제학회는 물론 국제학술지와 저술로 발표해서 역사에 길이 남게 했다는 것이다.
나는 왜 과학자가 되었나.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상상해보는 것을 즐겼다. 나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많았다. 나는 한 가지 문제를 잡으면 해결할 때까지 절대 포기한 적이 없다. 나는 한 문제를 풀려고 하면 그것에 집념해서 인내심을 가지고 해결하므로 진리를 발견한 성취감에 크게만족한다.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재물과 권력 보다 지식에 인생목표를 두고 살아왔다. 나는 왜 과학자가 되었나 다시 물어도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서 과학자가 되었다고 답한다. 그리고 성취는 집념에서 온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나는 천인함침몰의 진실을 밝히는데 책임과 보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운좋게도 많은 은인들을 만나는 행운이 따랐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사람들한테 빚을 졌다. 나의 아들까지도 나에게 많은 관련자료와 서적을 보내줄뿐만 아니라 냉정한 비평과 논쟁을 통해서 많은 지식을 쌓게 했다.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를 도와주었던 많은 은인들과 지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이글을 보내고 싶다.



2024년 4월 15일
김 소 구 (金 昭 九)

목차

제1장 전쟁의 고통과 죽음
제2장 피난 생활과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
제 3 장 야망과 실망
제 4 장 청운의 꿈을 위하여
제5장 남태평양 해양탐사선에서
제6장 잊을수없는 여행과 추억
제7장 광활한 대륙 중국, 러시아 및 몽고
제8장 혹가이도(Hokkaido)와 도가치다케 화산탐사
제9장 재미있는 응용물리학-지구물리학
제10장 지진 연구에 숨은 이야기들
제11장 인생에서 성취감과 가장보람 있던 시절
제12장 조국의 부름과 새로운 도전
제13장 잘나갈 때 조심하라
제14장 연구실 화재와 시련
제15장 신이란 누구인가?
제16장 아내를 만나다
제17장 하고싶은 말
제18장 정치와 종교는 과학을 이길수 없다
제19장 에필로그

책리뷰

저자소개

서울고 졸업
서강대학 물리학과 졸업 이학사
미국 오리건 주립대학원 (OSU) 해양학 지구물리학 이학석사
미국 세인트루이스(St. Louis)대학원 지구물리학 이학박사

한양대학 물리학/지구해양과학과 부교수/교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유치과학자
미국 사이즈모그래프 회사 석유탐사자료실 선임지진파분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