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반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 사기시리즈1

사마천의 사기에서 지혜를 배우다 사기시리즈1

지은이 : 고종문
출간일 : 2015-04-24
판매가 : 10,000원
포멧 : ePub
판매서점

책소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란 인류사회 변천의 기록이며 흥망성쇠 과정의 기록이다.
우리는 보통 역사를 ‘역사적으로 중대한 사건(historically significantly event)’을 칭한다.
서양에 헤로도투스(Herodotus)가 있다면 동양에는 사마천이 있다.
사마천은 지금으로부터 약 2150년전 중국 한나라시대의 역사가이다.
그는 중국 최초의 위대한 역사가이다.
사마천의 부친은 한나라의 무제아래에서 태사령을 지냈다.
그는 눈을 감으면서 사마천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역사사가 될 것을 유언한다.
따라서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 20세때 3년간 여행을 다니면서 역사가로서의 현장 감각을 익혔다.
사마천은 무제아래에서 태사령이 된다.
사마천은 꼿꼿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당시 친구 이릉이 흉노정벌을 위해 나갔다가 적에 포위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사마천은 친구 이릉을 변호하다가 급기야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후 사마천은 속전 50만전이 없어 ‘성기를 자르는’ 궁형에 처해진다.
궁형을 당한 사마천은 <보임안서>에서 ‘궁형을 당한 치욕이 얼마나 컸던지’, 욕(辱)자를 19번이나 쓴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으면서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구우일모, 九牛一毛)과 같을 뿐이다.”
한마디로, ‘죽기는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 뽑는 것만큼 쉽다’는 얘기다.
그러나 궁형을 받고 사기를 완성하자니 수치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사마천은 결국 그는 궁형을 택하고야 만다.
그때 나이가 바로 49세(97년)였다.
당시 남자들의 평균수명이 50세 정도였던 것을 생각하면 궁형 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전문가들은 당시 사마천이 궁형 후 살 수 있는 확률이 20% 정도였다고 한다.
사마천의 심경은 어땠을까?
한무제를 섬기며 전 생애를 조정에서 보낸 관료였던 사마천...
이제 그는 신하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인물이 되었다.
...
거세당한 사마천은 괴로웠다. 그가 인안에게 보낸 편지 <보임소경서>에서 다음과 같이 절규하고 있다:

"하루에도 창자가 아홉 번이나 꼬이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정신이 멍멍하고,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당한 수치를 생각할 때마다 등에 식은땀이 흥건하여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腸一日而九回,居則忽忽若有所亡,出則不知所往。每念斯恥,汗未嘗不發背沾衣也)

“이(利)를 탐내는 것보다 더 참혹한 회는 없으며 마음을 상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론 슬픔은 없고 선영을 욕되이 하는 것보다 더 추한 행동은 없으며 궁형을 받는 것보다 더 큰 치욕은 없습니다.”

이처럼 사마천은 자기가 궁형에 처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人固有一死 或重於泰山 或輕於鴻毛 用之所趣異也
(인고유일사 혹중어태산 혹경어홍모 용주소추이야)
사람이 본디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기러기 털(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용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사마천은 ‘태산보다도 더 무거운 죽음을 살겠다’는 의미이다.

결국 사마천은 궁형이후 다시 복귀하여 장관이 된다.
그러면서 그는 역사에 길이 남을 사기 130권을 완성한다.
사기는 중국 역대 대표 역사서 25사 중 가장 오래 된 사서.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이다.
단 한 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세계 통틀어도 드물다.
분량 자체도 130권, 526500자로 무지막지하지는 않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라서 죽간으로 기록되었다.

사기는 어떤 책이고 왜 읽어야 하는가?

(1) 최초의 기전체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하는 편년체가 아니다.
편년체란 역사기록을 연, 월, 일순으로 정리하는 역사편찬의 한 체재로 동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오래된 역사편찬체재이다.
중국의 편년체 사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공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쓴 춘추(春秋)이다.
맹자는 ‘춘추는 공자가 지었다’고 한다.
춘추의 유래는 일 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필체가 매우 엄중하였으며, 대의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며, 춘추대의라 함은 춘추에서 내린 엄중한 대의명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춘추필법이라 하면 엄중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글쓰기 법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사마천 이전에는 이와 같은 편년체로 역사를 기록했다.
그러나 사마 천(司馬遷), 반고(班固) 등이 기전체(紀傳體)에 의하여 역사를 정리하면서부터 중국의 정사는 모두 기전체로 편찬되었다.
기전체는 각 사건과 인물을 개별적으로 기술하는 기전체형식으로 사기가 이에 해당하는 최초의 역사서이다.
사기이후 역사를 서술하는데 있어 기전체의 장점이 부각되어 대부분의 정사(正史)가 기전체로 기록되어있다.
정사란 정통역사서의 준말로 중국 정부가 편찬한 역사서이다.
중국 역대 왕조가 공인한 정사는 ‘이십사사(二十四史)이다.
사기부터 명사(明史)까지 총 3,223권, 약 4,683만 자에 이른다.
여기에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정사로 인정한 신원사(新元史)를 더하여 ‘25사’로, 또 1928년 초고 형태로 나온 청사고(淸史稿)까지 합쳐 ‘26사’로 부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사라 함은 보통 24사를 일컫는다.

(2) 명분을 중시하기보다는“실제 상황"을 중시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명분보다는 실제 상황을 더 중시했다.
사례를 살펴보면, 항우를 한때나마 천하를 제패한 패왕으로 인정하여 세가나 열전에 서술하지 않고 본기에 서술하였다.
또한, 한나라 한무제의 둘째 아들 혜제는 사실상 허수아비 황제였기 때문에 그의 본기는 아예 없다.
대신 한무제의 부인으로, 황후였던 여후는 뒤에서 힘을 휘두르면서 혜제를 조종했으나 본기에 들어가 있다.
이는 사기가 ‘한무제가 황제일 때’ 쓰여 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과감한 처사다. 아마도 사마천은 한무제에게 궁형을 당했기 때문에 한왕조에 대해 분과 한이 서려서 이런 서술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례는 또 있다.
제후가 아니었던 공자와 6개월간 ‘자칭 왕’을 한 진승을 세가에 넣은 것도 특이하다.
물론, 공자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은 위대하나 어쨌든 제후는 아니었지만 그 반열에 올려놨지만 말이다.

(3) 높은 신뢰도를 유지하고 있다.
사기의 중국의 역사 중 가장 오래된 상나라 혹은 은나라 관련 기술까지 있다. 상나라는 사마천이 살던 시기인 전한과도 약 천 년 이전역사인데도 말이다.
일반적으로 상나라는 전설로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허나 20세기에 들어와 상나라의 수도였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나타난 상나라 왕들의 이름과 순서는 사기의 기술과 거의 일치하여 사기의 상나라 관련 기사에 대한 신뢰도를 증명해주었다.

(4) 사기는 모든 인간학의 저서이며 역사의 시작이다.
사마천은 궁형이란 개인의 비극을 처절하게 극복한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하여 얼음장같이 냉정하여지고, 객관적인 역사를 쓰기위해 몸부림친다.
현대 역사가들은 사기를 단순한 역사학이나 인문학 저서가 아닌 태고부터 춘추전국시대, 한무제까지의 오만군상의 인간상과 사마천 본인의 개인적 고뇌가 담긴 인간학의 저서로 평가한다.
춘추 시대(春秋時期, 기원전 770~403)는 중국의 역사에서 기원전 770년에서 기원전 403년 사이의 시기를 말하며, 주나라의 동천 이후 진나라의 중국 통일까지의 시기를 부르는 춘추 전국 시대의 전반기에 해당된다.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와의 경계는 춘추 시대에 열국의 강국 진(晋)이 조·위·한의 3국으로 분열되어 동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은 기원전 403년까지로 잡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진의 집정하에 있던 지백(知伯)을 멸망시키고 사실상 3국의 분립이 성공한 기원전 453년으로 올려 잡는 설도 있다.
전국시대는 일반적으로 5세기 말(B.C.403)에 진(晉)이 멸망하고 한(韓), 위(魏), 조(趙)로 나누어진 것을 시작으로 한다.
『사기』진세가에 ‘정공 2년, 위 무후, 한 애후, 조 경후가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토지를 공평하게 분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는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를 일컫는다.
...
중국의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량치차오는 사기의 10대 명편을 선정했다.
그가 꼽는 10대 명편은 항우본기, 신릉군열전, 염파인상여열전, 노중련추양열전, 회음후열전, 위기무안후열전, 이장군열전, 흉노열전, 화식열전, 태사공자서라고 한다.
또한 사마천의 사기로 중국에 역사학이란 것이 시작되었다고 평했다.
사기이후 수많은 보수적인 사람들은 사기를 '정부를 헐뜯고 비난하는 방서'라고 비난했다.
사기는 동양은 물론 서양학자들에게도 전해져 익히 알려졌다.
'영웅전'을 저술한 플루타르코스와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책이라 극찬하며, 중국 최초의 믿을 만한 역사서라고도 평가하고 있다.
...
이책은 사기시리즈 제1권으로 다음의 세편으로 구성되어있다.
1. 사마천은 누구인가?
2. 사기는 어떤 책인가?
3. 본기 12권 및 세가 30권 등이다.

목차

<목차>

제1편 사마천은 누구인가?

1. 역사란 무엇인가?

2. 사마천의 생애
1) 출생 후 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역사가적 자질과 소양 교육 등 예비기
2) 38세때 태사령에 임명된 후, 사기집필을 시작했으나 완성시키지 못한 시기
3) 48세때 궁형(宮刑)을 당하고, 옥에 갇혀 집필이 중단되었던 시기
4) 50세 경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된 후, 사기를 완성한 시기

3. 궁형과 사마천
1) 궁형이란?
2) 사마천의 궁형

4. 사마천의 사상 및 역사관

5. 사마천의 여행
1) 여행의 개관
2) 사마천은 왜 회계산과 용문에 올랐을까?
3) 굴원이 노래한 곳을 가다
4) 제나라를 탐방하다
5)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에 참여하다
6) 곡부에서 공자의 숨결을 느끼다
7)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운명에 대한 감상

6. 사마천의 묘와 사당
1) 사마천의 묘
2) 사마천의 사당

제2편 사기는 어떤 책인가?

1. 130권의 통사

2. 왜 사기인가?

3. 사기의 내용과 특징

4. 사기의 저술배경

1) 진나라의 통일과 한나라의 건국
2) 사상적 배경
3) 사회 및 경제적 배경

5. 사기의 의의 및 평가

1) 의의
2) 평가

제3편 사마천의 본기 및 세가

1. 본기

1) 오제본기(五帝本紀)
2) 하본기(夏本紀)
3) 은본기(殷本紀)
4) 주본기(周本紀)
5) 진본기(秦本紀)
6)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7·8) 항우본기(項羽本紀)와 고조본기(高祖本紀)
9)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10) 효문본기(孝文本紀)
11) 효경본기(孝景本紀)
12. 효무본기(孝武本紀)

2. 세가

1)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3)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5) 관채세가(管蔡世家)
6) 진기세가(陳杞世家)
7) 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
8)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
9) 진세가(晋世家)
10) 초세가(楚世家)
11)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12) 정세가(鄭世家)
13) 조세가(趙世家)
14) 위세가(魏世家)
15) 한세가(韓世家)
16)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
17) 공자세가(孔子世家)
18) 진섭세가(陳涉世家)
19) 외척세가(外戚世家)
20) 초원왕세가(楚元王世家)
21) 형연세가(荊燕世家)
22) 제도혜왕세가(齐悼惠王世家)
23)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24) 평양후(平陽侯) 조참(曹參)세가
25) 유후세가(留侯世家)
26) 진승상평세가(陳丞相平世家)
27)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
28) 양효왕세가(梁孝王世家)
29) 오종세가(五宗世家)
30) 삼왕세가(三王世家)

<참고자료>

책리뷰

“역사는 사례를 통해 가르치는 철학이다.(History is philosophy teaching by example.)”
고대 그리스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투키디데스(기원전 465년경-기원전 400년경)가 내린 역사에 대한 정의다.
역사는 사례로 우리들에게 지혜를 준다.
사마천, 그는 2160년전의 중국 역사가로 130권의 사기를 썼다.
그의 역사책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닌, 문사철이 집적된 역사철학서이다.
범인들이 어떻게 그의 작품을 쉽게 평가할 수 있으랴?
...
이 책은 세파트로 나뉜다.
사마천의 사기 중에서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기는 어떤 책인가?
그리고 12편의 본기와 30편의 세가에 대해 알아본다.
...
사마천은 2160여년 전의 인물로, 역사의 성인이라 불린다.
수 많은 세인들은 사마천을 아래와 같이 평가하고 있다.

“유향(劉向)과 양웅(楊雄)의 저술을 비롯하여 여러 서적들 모두에서 한결같이 사마천은 훌륭한 역사가의 재능을 지녔다. 그의 문장은 사리가 분명하고 체제가 잘 잡혀 있으면서도 겉치레가 없고, 질박하면서도 비속하지 않음에 탄복했다고 한다. 문장은 곧고 그 핵심을 찔러 헛되이 칭찬하지 않았으며 약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서 실록(實錄)이라 한다.” (반고의 한서(班固,漢書))

“그 말은 두루두루 통하니, 진실로 저술가 중에 깊은 못, 넓은 바다와 같은 존재다.”(당 역사학자 유지기(劉知畿, 661~721))

“경전을 꿰뚫었고, 고금을 내리훑어 이리저리 엮어 바로잡았다.”(당 역사학자 사마정(司馬貞, ? ~ ?))

“백 세대가 된다고 해도 사관은 그 법을 바꿀 수 없고 학자는 그 책을 버릴 수 없다. 육경(六經)이 나온 이후로 이 책이 있었을 따름이다.”(남송 역사학자 정초(鄭樵, 1104~1162))

“사기는 산천을 유람한 기록 같다. 어떤 곳의 경치를 말하면서 앞에는 어떤 산이 있고 뒤에는 어떤 물이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는 곧 대가의 글이다. 다른 사람의 글은 밋밋하거나 작은 그림을 보는 듯한데, 사마천의 문장은 '장강만리도' 같다.”(명 학자 귀유광(歸有光, 1506~1572))

“오늘날 사기를 읽으면 유협열전에서는 의를 위해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다고 느껴지고, 굴원가생열전을 읽으면 그들 우국지사의 운명에 눈물을 흘리게 되며, 장자나 노중련의 열전을 읽으며 세속을 떠나고 싶으며, 이광의 열전을 읽으면 즉각 전쟁터에 나가 혁혁하게 용맹을 떨치고 싶어지고 신릉군이나 평원의 열전을 읽으면 숨은 재주를 지닌 다양한 문객들을 기르고 싶어진다. 이는 무슨 때문일까? 모든 내용이 각각 사물의 실정에 들어맞아 독자의 마음속 깊이 전달되기 때문이지, 구구한 구절이나 글자가 독자를 격발시킨 것은 결코 아니다.”(명 문장가 모곤(茅坤, 1515~1601))

“옛 사람들 중 역사를 기록하면서 논단(論斷)에 의지하지 않고 사건을 서술하면서 그 뜻을 드러내는 일은 오직 태사공만이 할 수 있었다.”(청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

“그(사마천)로부터 체제가 정해져, 역대로 사서를 저술하는 사람치고 그 범위를 벗어나는 법이 없는 사가(史家)의 절대 법칙이 되었다.”(청 평론가 조익(趙翼, 1727~1814))

또한 노신(魯迅, 1881~1936))은 “사가(史家)의 절창(絶唱)이며, 가락 없는 <이소(離騷)>다. 이 말은 노신이 한문학사대강(漢文學史大綱)에서 한 말로 절(絶)은 ‘극치’의 뜻으로 ‘전무후무하다는 뜻’이다.
사기가 중국 사서의 비조로 독보적인 경지에 달하여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기를 능가할 수 없다는 지고의 극찬이다.

조선의 22대 정조대왕(正祖, 1752~1800)은 몸소 통독한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골라 책으로 ‘사기영선’을 펴냈다.
사기를 완독하였으니 80일이 걸렸다고 한다.

정조는 사기를 읽은 후 이렇게 평했다.

“자장의 문장은 끝없이 넓고 커서 마친 신우(우임금)가 물을 다스리고 한신이 군사를 자유자재로 다루듯 하여 일반적으로는 잘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자장의 글은 억양과 굴절에 기품과 격조가 있고, 기복과 조응이 정밀하고 빼어나서 마치 구슬을 쟁반에 놓고 굴리거나 컴퍼스를 가지고 원을 그리는 것과 같이 저절로 상세한 서술이 있다.”

정조는 '사기','한서' 두 권의 역사서에서 각각 27권, 8권의 백미를 가려 뽑고,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에게 교정을 보게 한 후 1797년 책으로 편찬했다.
그는 당시 “지식인들이 명말 청초의 패관문학이나 서학(천주교)에 경도된 것을 비판하며 ‘이를 바로잡겠다’는 의지로 사기영선을 펴냈다”고 밝혔다.

따라서 정조가 사기영선에 발췌된 인물들을 보면 충신, 명재상, 지사, 청백리, 지식인 등 나라에 보탬이 되고 귀감이 되는 인물들이다.
정조는 특히, 당시 사농공상의 계급제도가 뚜렷했던 지라 천대받는 장사치들의 전기인 ‘화식열전’을 이 책에 포함시켰다.
정조는 ‘부해지면 덕을 행하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였다.
정조는 결국 벼슬아치나 성공한 사람들이 의로움을 실천하도록 유도해 사회통합을 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저자소개

고종문(高鍾文)

<학력>
경제학석사(MA), 박사(Ph.D), 美 American University
법학박사(Ph.D), 명지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경제학사, 연세대학교
법학사, 평생교육원

<경력>
한국경제예측연구소 대표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Consilium Consulting Group 이사장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자문위원(이하 역임)
신구건설 사장
주택관리공단 사장
공기업평가위원, 혁신진단위원(기획재정부, 행자부)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
성균관대, 중앙대, 삼육대 겸임교수

<저서>
이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는 청년들을 위한 멘토
성공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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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옵션
e-mail: jm914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