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46년 5월 29일(음력)에 나의 고향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 큰 어지리에서 5남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이 남침하여 우리나라가 잿더미가 되었다. 6.25 전쟁 때 우리 아버지께서 어깨에 커다란 상자를 매고 오는 뒤를 하염없이 따라왔던 기억이 있다. 우리 집에 도착하여 한 번도 구경하지도 먹어보지도 못한 빵과 과자를 먹었던 기억이 나의 기억 중에서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 당시 내가 먹었던 과자와 빵이 미국에서 보내준 구호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본다.
내가 어릴 때 고향 집 옆에 동경올림픽에서 양궁에 금메달을 딴 김재덕 선수의 증조할아버지가 살았다. 내가 김재덕 선수의 셋째 할아버지와 친구 사이었다. 그래서 김재덕 선수의 증조할아버지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그 당시에 그 집에 라디오와 손으로 돌리는 축음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네모 상자 속에서 사람의 소리가 들리니 친구들이 “상자 속의 사람이 배가 고프다고 밥을 주어야 한다”라고 할 정도로 신기해하였던 기억도 있다.
나는 열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학교에서 분유를 한 사발씩 나누어주었다. 우리 어머니가 분유를 반죽하여 밥하는 밥 위에 얹어 우유 떡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 분유도 미국에서 보내준 것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교과서를 받았다. 교과서에서 얼마나 좋은 향이 나왔는지 모른다. 그 향기에 이끌려 교과서를 많이 읽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교사가 꿈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안동 병설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치기 위하여 공부를 많이 하였다. 그런데 내가 졸업하던 해에 안동 병설 중학교가 폐교되었다. 그래서 예천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장학생이 되었다.
예천중학교가 고향 집에서 너무 멀어 집에서 통학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천읍에 방을 얻어 자취하였다.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 공부가 되지 않았다. 토요일이 되면 몸은 교실에 앉아 있는데 마음은 벌써 고향 집에 가 있었다. 그래서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통지표를 받으니 우리 반 65명 중 34등을 하였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중고 자전거를 사서 집에서 통학하였다. 집에서 통학하니 마음이 편하고 안정되어 공부를 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졸업할 때는 대구에 있는 사대부속고등학교에 입학시험을 쳤다. 그러나 떨어졌다. 그래서 고향에 빈자리가 있는 예천 농업고등학교에 추가로 입학하였다. 예천 농고 다닐 때 선생님들이 나에게 “괘도를 그려오라.”라고 할 정도로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예천 농고를 졸업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하여 안동교육대학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하였다.
1969년 2월에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3월 1자로 나의 고향 면 옆에 있는 풍양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으면서 교사의 꿈을 이루었다. 고향 집에서 풍양초등학교까지 통근할 수 없어서 풍양초등학교 옆에 방을 얻어 자취하였다. 너무 불편하여 풍양초등학교에 4개월 15일간 근무한 후 1969년 7월 15일 자로 나의 고향 면에 있는 지보초등학교로 이동하였다. 첫 발령 받고 학교에 가니 학생들에게 한 줄에 다섯 개씩 달린 커다란 빵을 한 줄씩 나누어주었다. 빵을 만든 밀가루는 미국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나는 교육대학 졸업 두 달 전인 1968년 12월 25일 스물세 살의 나이로 하늘로부터 하얀 선녀님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신붓집 마당에서 다음 해에 신부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는 묵 신행 구식결혼을 하였다. 풍양초등학교에서 지보초등학교로 이동하고 집사람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는 우리 집 결혼식을 또 하였다. 그래서 내 나이 스물네 살에 우리 맏아들, 스물여섯 살에 둘째 아들이 고향 집에서 태어났다.
고향 집에서 3년 7개월간 지보초등학교에 출퇴근하다가 예천군의 중심학교인 예천초등학교로 이동하면서 예천초등학교 뒤편에 부엌으로 드나드는 단칸 셋방을 얻어서 분가하였다. 단칸셋방에서 내 나이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에 우리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아들들이 커가니 단칸 셋방에 다섯 식구가 살 수 없어서 우리 집을 사기로 하였다.
그래서 부모님께 10년 가까이 매달 보내던 봉급 전액으로 농협에 1년에 150만 원짜리 적금을 넣었다. 적금을 넣자마자 예천읍에 대지 180평 한옥이 180만 원에 나왔다. 집을 사려고 적금 대부받으러 가니 “적금을 3개월 넣어야 적금 대부 하여 준다.”라고 하여 적금 대부받지 못하였다. 그 농협에 중학교 동기가 근무하고 있어 동기의 도움으로 적금 대부받아 대지 180평의 한옥을 180만 원에 샀다.
셋방에 살 때 텔레비전을 판매 상회하는 김재덕 선수의 넷째 할아버지의 권유로 커다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금성 흑백 TV를 샀다. 박정희 영부인 육영수 여사 장례 때는 우리 아버지와 고모부가 육영수 여사 장례를 텔레비전으로 보기 위하여 우리 집에 올 정도로 텔레비전이 귀할 때였다.
첫 발령을 받으면서 시작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검정 고시에 6년 만에 합격하여 예천 초등에서 예천군에 있는 용궁 종합고등학교로 전직하였다. 용궁 종합고등학교에 2년 근무한 후 예천농업고등학교로 이동하였다. 예천 농고로 이동할 때 집을 지어 판매하는 사람이 “자기가 금방 지어 놓은 800만 원짜리 양옥과 우리 한옥을 바꾸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 한옥을 500만 원 계산해 주겠다면서 300만 원을 더 달라.”고 하여 300만 원을 더 주고 양옥으로 바꾸었다.
양옥으로 이사 가면서 처음으로 수세식 양변기도 사용하였고, 그 당시 귀하던 집 전화도 넣었고, 거실에 소파, 안방에 장롱, 주방에 식탁도 그 당시 가장 비싼 보르네오 가구를 넣었다. 그리고 비싼 커튼까지 걸면서 처음으로 문화생활을 하였다.
예천 농고에 근무할 때 우리 맏아들이 중3, 둘째 아들이 중1, 막내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아들들 교육을 위하여 대구로 이사 가기로 하였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과 떨어져 공부하지 못하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천 농고에서 영천시로 내신을 내어 대구에서 가장 가까운 금호여자고등학교로 이동하면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금호여고로 발령이 난 후 대구로 이사하려고 하니 예천 양옥이 팔리지 않았다. 그래서 예천 양옥을 가을에 1,500만 원을 받기로 하고 외상으로 집을 팔고 대구로 이사 와서 1년간 셋방을 살았다. 그해 가을에 1,500만 원을 받고, 그때까지 내가 벌어 놓은 1,500만 원으로 그다음 해인 1986년 1월에 지금 내가 사는 범어2동에 금방 지은 대지 70평, 건평 59평인 2층 양옥을 4,400만 원을 주고 샀다.
모자라는 돈 1,400만 원은 2층 전세 900만 원을 받고, 나머지 500만 원은 빚을 얻어 샀다. 얻은 빚 500만 원은 집을 사던 해 금호여고 선생님들과 계를 모아 첫 번째로 받아 갚았다. 내가 이렇게 내 집을 마련하고 아들 셋을 대학까지 졸업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7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개발 계획으로 공업을 일으켜 수출을 많이 하여 돈을 많이 벌어왔기 때문이다.
금호여고에 3년 근무한 후 경산고등학교로 이동하여 3학년 담임을 연속적으로 하였다. 경산고등학교 근무할 때 우리 맏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1지망을 경북대학교 치과대학, 2지망을 전자공학과에 내었다. 그런데 전자공학과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맏아들에게 “한 해 재수해보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맏아들이 공부하는 데 지쳐서 그런지 “전자공학과에 그냥 다니겠다.”라고 하였다.
맏아들을 재수시키기 위하여 맏아들 모르게 시내에 있는 유신학원을 찾아갔다. 유신학원은 단과반만 운영한다고 하여 유신학원 옆에 있는 일신학원을 찾아갔다. 일신학원에서 “고등학교 성적증명서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맏아들이 졸업한 고등학교에 가서 성적증명서를 받아서 일신학원에 제출하니 “성적이 좋다.”면서 받아 주었다. 그래서 일신학원에 등록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맏아들에게 “1년 더 재수하여 보자.”라고 설득하였다.
그래서 1년 재수하고 나니 대학 수학 능력 성적이 잘 나와서 경북대학교 치과대학에 합격하였다.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지하철 3호선 수성시장역 네거리에 있는 수성빌딩 4층에서 ‘선 치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경산고등학교 근무할 때 교육부에서 초등학교 경력을 ‘을’ 경력에서 ‘갑’ 경력으로 환산해 주었다. 중등으로 전직하면서 일찍이 포기하였던 교감으로 승진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경산고등학교에서 교감승진에 필요한 벽지 점수를 받기 위하여 벽지학교가 많은 문경으로 내신을 내었다. 대구 가까이 금호여고와 경산고등학교에 근무하여 이동점수가 낮아 문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예천군에 있는 감천고등학교로 발령이 났다.
감천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3학년 담임하였다. 그해 가을에 3학년 대학 수학 능력 원서를 대구에 있는 경북교육청에 접수하러 오면서 우리 둘째 아들의 대학 수학 능력 원서도 함께 써서 왔다. 그때 우리 둘째 아들이 D 대학교 사대 수학과 2학년을 마치고, 대구 비행장 안에 있는 공군부대에 방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쳐서 발령이 잘 나는 대구 교육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둘째 아들은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대구 시내에서 부부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우리 막내아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의과 대학이 목표이었다. 졸업하던 해에 1지망을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 2지망을 유전공학과에 응시하였으나 유전공학과에 합격하였다. 그래서 1년 재수하고 자기 둘째 형과 함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쳤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했던 만큼 대학 수학 능력 점수가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 입학 원서를 접수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원서마감날 원서를 들고 가톨릭대학교 의과 대학에 가서 원서를 접수 시켰다. 그런데 합격이 되었다. 막내아들은 가톨릭대학교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죽전네거리에 있는 옛날 알리앙스 예식장 정문 앞에, ‘동서 비뇨기과 피부과’를 운영하고 있다.
감천고등학교에 1년 근무한 후 문경으로 내신을 내어 교감으로 승진할 수 있는 벽지학교인 문경서중학교로 바로 들어갔다. 내가 문경으로 들어갈 때 경북교육청 인사 원칙이 “벽지학교 근무한 사람은 3년 이내에 벽지학교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인사 원칙으로 바뀐 첫해이었다. 그래서 벽지학교에 국어과 자리가 많이 비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두고 관운이라고 하나 보다. 문경서중에서 벽지학교 만기인 3년을 근무한 후 선산 여자고등학교로 이동하였다. 선산 여자고등학교에서 5년간 교무부장을 하면서 교감승진에 필요한 점수들을 모두 모았다.
교감승진에 필요한 점수는 경력점수(35년 만점), 근무성적(교장이 주는 1등 수, 세 번 연속 받아서 만점), 1급 정교사 자격연수 점수(96점), 60시간 이상 받은 일반연수 세 개의 합산점수(99점, 99점, 98점), 연구점수, 벽지학교 근무점수, 국가 자격연수 점수, 연구학교 근무점수, 농촌학교 근무점수, 주임 근무점수 (7년 만점)을 모두 채우고 나니 교감승진 대상자로 지명을 받았다. 교감 자격연수를 받고, 노부모 봉양 조건으로 1년 유예하여 선산 여고 6년 근무한 후 의성 다인 종합고등학교 교감으로 승진이동 하였다.
다인 종합고등학교에 1년 근무한 후 대구 집에서 통근할 수 있는 구미 진평중학교 교감으로 이동하였다. 진평중학교에 3년 근무한 후 교장 자격 연수대상자로 지명을 받고, 경산 장산중학교로 이동하였다. 경산 장산중학교에서 교원대학교에 가서 중등 교장 자격연수를 받다가 과음과 과로로 간암에 걸렸다. 교장 자격연수를 모두 마치고 외국에 나가 3개월간 기다려 통 간이식을 받고 돌아와 포항 호미곶광장 솔숲 속에 있는 대보중학교 교장으로 승진 이동하였다.
대보중학교에 1년 6개월간 근무한 후 영천여자중학교 교장으로 이동하여 초, 중, 고 열다섯 학교에서 42년간 근무한 후 내 나이 65세가 되던 2011년 2월 14일 영천여자중학교 대강당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식 하면서 정년퇴직 기념수필집 ‘발자국’을 출간하였다.
정년퇴직하던 2011년 5월에 순수종합문예지인 월간 문학세계와 한국문학 세상 신인문학상에 ‘발자국’에 실려 있는 ‘아내의 생일’을 두 문예지에 동시에 응모하여 동시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하였다. 수필가로 등단하고 내가 1946년에 태어나서 살아온 190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시대상을 반영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글의 소재가 풍부한 일상생활을 소재로 하여 200자 원고지 40매 내외의 생활 글을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2,448편을 써서 매주 세 차례 월요일, 목요일, 토요일에 페이스북과 다섯 곳의 인터넷 카페에 올린 후 나의 글 친구 300여 명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다. 일상 생활하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키네마스터로 편집하여 시나리오를 써서 내 목소리로 녹음하여 유튜브로 1,537편을 올렸다. 올린 유튜브는 글을 보내지 않는 매주 화, 수, 금, 일요일에 나의 글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다. 그리고 해마다 두 차례 설과 추석 명절에 수필집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스물일곱 권을 출간하였다.
수필집 출간 횟수가 늘어나자 고향 부모님 산소 옆에 타임캡슐을 묻고 싶었다. 그래서 2020년 2월 코로나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때 3개월간 타임캡슐 묻을 준비를 하여 2020년 5월 3일(일)에 100년 후인 2120년 5월 5일(일)에 개봉하는 염 해일의 타임캡슐을 고향 부모님의 산소 옆에 묻어 놓았다. 타임캡슐에 보관한 보물들은 내가 출간한 수필집, 염 해일의 발자취 파일,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이다.
염 해일의 발자취 파일에는 내가 보관하고 있던 413점의 교육자료와 아버님이 물려주신 12점의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외장하드에는 내가 그때까지 쓴 수필 1,476편과 수필집 출간원고, 타임캡슐에 보관한 보물들을 찍은 사진, 내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찍어 놓은 사진과 동영상들이 저장되어 있다. 외장하드 사본은 2070년 3월 5일에 조선일보 150주년 기념으로 개봉하는 타임캡슐에 우리 손주 여덟 명에게 쓴 편지와 함께 보관하여 놓았다.
정년퇴직 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하여 정년퇴직 두 달 전에 금빛평생교육봉사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정년퇴직 후 대학 강의를 듣기 위하여 정년퇴직 한 달을 남겨 놓고 선착순으로 모집하는 국립대구 박물관대학에 새벽에 나가 줄을 서서 입학하였다.
정년퇴직 후 금빛평생교육봉사단원으로 대구 서부도서관에서 정규 학교 교육받지 못하신 어르신들 30여 명에게 코로나 직전까지 10년 가까이 한글 교육봉사를 하였다. 그리고 대구 교육청에서 결연 맺어 준 다문화(베트남) 학생에게 한국어 지도, 대경 뿌리 학교 교육위원으로 초, 중, 고 학교 현장에 나가 뿌리교육과 전통 놀이지도, 대구문화지킴이회 회원으로 문화재 보호 활동도 하였다. 매일신문사에서 자매지 ‘시니어 每日’을 창단하면서 제1기 기자 모집하였다. 기자 시험에 응시하여 1차 논술시험, 2차 기사 작성 시험에 합격하여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내 평생에 가장 잘한 일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아들들 교육을 위하여 고향 예천 농고에서 영천으로 내신을 내어 금호여고로 이동하면서 대구로 이사 온 것이다. 둘째는 정년퇴직할 때 정년퇴직 기념수필집 ‘발자국’을 출간하여 발자국에 실려 있는 아내의 생일로 수필가로 등단하여 지금까지 매일 글을 쓰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셋째는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두 시간 동안 새벽 온몸운동하고, 오후 3시에 야시골 공원에 나가 두 시간 동안 만 보를 걸어 건강한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하여 본다.
2025년 80회 내 생일에 염 해일의 스물여덟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을 출간하고 싶었다. 내가 태어난 지 79년째 되는 지난해에 42년간 근무하였던 초, 중, 고 열다섯 학교를 추억 여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첫 번째 추억여행은 금호여자고등학교, 영천여자중학교, 포항 호미곶광장 솔숲 속에 있는 대보중학교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금호여고는 우리 아들들이 대구에서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한 학교이고, 영천여자중학교는 42년간 교직 생활을 교장으로 마무리하게 한 학교이고, 대보중학교는 교사들의 꽃이라고 하는 교장으로 승진한 학교이다. 대보중학교 추억여행하고 대보중학교 담장 너머에 있는 호미곶광장을 관광하기로 하였다.
두 번째 추억여행은 풍양초등학교, 지보초등학교를 찾아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꿈이었던 교사의 꿈을 이루었던 초임 교사 시절을 회상해 보기로 하였다. 풍양초등학교는 초임발령을 받고 4개월 15일간 근무한 후 나의 고향 면인 지보초등학교로 이동한 학교이다. 지보초등학교는 고향 집에서 3년 6개월간 출퇴근하다가 예천군의 중심학교인 예천초등학교로 이동한 학교이다.
지보초등학교를 추억여행하고 가까이에 있는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 큰 어지리 고향 마을 뒤편 8마지기 우리 밭에 모셔 놓은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부모님 산소 옆에 묻어 놓은 염 해일의 타임캡슐과 타임캡슐 앞에 우리 부부가 즐겁고 행복한 인생 여행이 끝나는 날 편안히 잠들 수 있는 부부 형 평장 묘도 함께 들러보기로 하였다.
세 번째 추억여행은 문경서중학교, 선산 여자고등학교, 구미 진평중학교를 찾아가 교감, 교장으로 승진하기 위하여 피나게 노력하였던 흔적들을 회상해 보기로 하였다. 벽지학교인 문경서중학교는 교감으로 승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된 학교이고, 선산 여고는 교감승진 점수를 모두 모아 교감연수대상자로 지명받고, 교감 자격연수를 받은 학교이다. 진평중학교는 교감 근무 4년 만에 교사들의 꽃이라고 하는 교장 자격연수 대상자로 지명받은 학교이다. 문경서중학교를 추억여행하고 문경서중학교 옆에 있는 문경새재를 자주 찾아갔던 옛 추억의 조각들도 하나하나 주워 맞추어 보기로 하였다.
네 번째 추억여행은 경산고등학교와 경산 장산중학교를 추억여행 하기로 하였다. 경산고등학교는 88 서울 올림픽 전해인 87년에 들어가 3학년 담임을 연속적으로 하면서 대학 진학에 대한 정보를 많이 쌓았던 학교이다. 그때 쌓은 정보로 우리 아들들 대학 진학에 도움을 많이 받았던 학교이다. 경산 장산중학교는 교감 시절의 마지막 학교로 교장 자격연수를 받고, 포항 호미곶광장 솔숲 속에 있는 대보중학교 교장으로 승진 이동하였던 학교이다.
다섯 번째 추억여행은 예천초등학교와 예천 용궁 종합고등학교, 예천농업고등학교를 추억여행하고, 고향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예천초등학교는 첫 발령 받으면서 시작한 국어과 중등교사 자격 검정고시에 6년 만에 합격하였던 학교이다. 용궁 종합고등학교는 예천 초등에서 중등으로 전직한 첫 번째 학교이다. 예천 농고는 내가 고향에서 40년간 살면서 마지막으로 근무하였던 학교이면서 나의 모교이다. 세 학교를 들러보고 고향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여섯 번째 추억여행은 의성 다인 종합고등학교, 감천고등학교를 추억여행 하기로 하였다. 의성 다인 종합고등학교는 선산 여고에서 교감으로 승진하여 교감 첫 발령 받았던 학교이다. 감천고등학교는 D 대학교 사대 수학과에 다니던 우리 둘째 아들을 발령이 잘 나는 교육대학으로 학교를 바꾸게 한 학교이다. 다인 종합고등학교를 추억여행하고, 예천 감천고등학교 가는 길에 고향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음력으로 5월 29일인 2024년 7월 4일이 79회 내 생일날이었다. 내 생일날부터 첫 번째 추억여행으로 금호여자고등학교, 영천여자중학교, 포항 호미곶광장 솔숲 속에 있는 대보중학교를 추억여행 하였다. 세 학교를 추억여행 하면서 교장 선생님과 인터뷰한 후 학교 실내외를 돌아보면서 내가 근무하였던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키네마스터로 편집한 후 교장 선생님과 인터뷰한 내용과 실내외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들과 내가 근무하였던 옛 추억들을 회상하는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써서 내 목소리로 녹음하여 유튜브로 올렸다. 유튜브로 올린 후 유튜브를 시청하면서 염 해일의 스물여덟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의 글을 쓰고 나니 7월 27일이다. 첫 번째 추억여행하고 정리하는 데 23일이 걸렸다.
두 번째 추억여행은 2024년 7월 29일로 셋째 처 숙모님 장례에 참석한 후 부모님 산소를 찾아보고, 지보초등학교, 풍양초등학교를 추억여행 하였다. 두 번째 추억여행하고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유튜브로 올리고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글을 쓰고 나니 8월 9일이다.
11일 동안 두 번째 추억 여행한 정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추석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세 번째 추억여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우선 급한 2024년 추석에 출간할 염 해일의 스물일곱 번째 수필집인 ‘수필가 염해일 교장, 기자로 변신하다.’란 수필집 출간 준비하였다. 출간원고 정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나니 8월 18일이다.
미루어 놓았던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세 번째 추억여행을 하루 쉬었다가 8월 20일에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8월 19일 일기 예보에 “8월 20일에 태풍 종다리가 상륙하면서 8월 22일까지 비가 내린다.”라고 예보하였다. 그래서 8월 23일에 세 번째 추억여행 하기로 하였다.
2024년 8월 23일에 세 번째 추억 여행지인 문경서중학교, 선산 여자고등학교, 구미시에 있는 진평중학교 순으로 추억여행 하였다. 세 번째 추억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유튜브로 올리고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글까지 쓰고 나니 2024년 10월 1일이었다. 세 번째 추억여행 정리하는 데 38일 걸렸다.
세 번째 추억여행 정리가 끝난 후 10월 2일에 네 번째 추억 여행지인 다인 종합고등학교, 용궁 종합고등학교, 예천초등학교를 추억여행 하기로 하였다. 네 번째 추억여행 하루 전인 10월 1일 저녁에 스마트폰 저장 공간을 확보하기 위하여 스마트폰 갤러리에 저장된 유튜브로 올린 동영상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삭제한 동영상들은 휴지통에 들어가 있어 한 달까지 보관되기 때문에 휴지통 비우기까지 모두 마쳤다.
그리고 스마트폰 갤러리를 열어보니 키네마스터로 편집할 때 앞에 오는 자막 바까지 모두 없어졌다. 자막 바가 없으면 편집한 키네마스터를 유튜브로 만들 수가 없다. 자막 바 만드는 방법을 오래전에 인터넷으로 배웠기 때문에, 자막 바 만드는 방법을 모두 잊어버렸다. 다시 인터넷으로 공부해서 자막 바를 만들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매일 밤 9시에 잠을 자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난다. 그리고 아침을 먹고 한 시간 동안 글을 쓴 후 오전 10시에 1시간 동안 낮잠 자서 매일 8시간 잠을 푹 자고 있다.
그런데 네 번째 추억여행 떠나기 하루 전인 10월 1일 저녁에는 자정에 잠이 들어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다시 잠을 자려고 하니 잠이 오지 않아 세 시간 정도밖에 잠을 자지 못하였다. 장거리 운전해야 하는 10월 2일 네 번째 추억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 날부터는 공휴일과 나의 모임들이 연속적으로 있어서 네 번째 추억여행은 10월 8일 화요일에 하기로 하였다.
10월 8일에 네 번째 추억여행으로 다인 종합고등학교, 용궁 종합고등학교, 예천초등학교 추억여행을 하였다. 네 번째 추억 여행한 후 찍어온 사진과 동영상으로 유튜브로 올리고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글을 쓰고 나니 10월 27일이다.
내가 근무한 열다섯 학교 중에서 지금까지 열한 개 학교를 추억 여행하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정말 학교들이 많이도 변하였다. 학교에 학생들이 없다. 내가 추억 여행한 11개 학교 중에 4개교가 폐교되었거나 다른 학교에 통폐합되었다. 멀지 않아 학생이 없어서 학교들이 많이 폐교될 것 같았다. 대부분 학교가 학생 수와 근무하는 직원들 수가 거의 비슷하다. 직원들도 남자보다 여자들 수가 월등히 많다.
네 번째 추억여행 정리가 끝난 다음 날인 10월 28일부터 11월 1일까지 1주일간 고향 친구들의 부부 모임인 건우회에서 세계문화유산인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여행 하였다. 인도여행을 하면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으로 80여 편의 키네마스터로 편집하여 유튜브로 올리면서 2026년 추석날에 출간할 염 해일의 서른한 번째 수필집 ‘세계문화 유산인 타지마할이 있는 인도여행’ 기행문을 쓰고 있다.
그리고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두 번째까지 다섯 학교를 추억여행 한 내용으로 2025년 설날에 출간할 염 해일의 스물여덟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첫 번째 수필집’ 출간 준비도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다섯 번째 추억여행은 바빠서 하지 못하고 있다.
염 해일의 스물여덟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첫 번째 추억여행’ 출간 준비가 끝나면 다섯 번째 추억여행과 여섯 번째 추억여행, 내가 졸업한 모교를 찾아가 학창 시절을 추억여행 하기로 생각하고 있다.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열다섯 학교 추억여행이 모두 끝나면 염해일 교장의 80년 추억여행 세 번째 추억여행 내용과 네 번째 추억 여행한 여섯 개 학교 추억 여행한 내용으로 염 해일의 스물아홉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두 번째 추억여행’을 2025년 추석 때 출간하기로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추억한 내용과 여섯 번째 추억여행, 내가 졸업한 모교를 추억한 내용으로 염 해일의 서른 번째 수필집 ‘염해일 교장의 80년 세 번째 추억여행’을 2026년 설날에 출간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1. 첫 번째 추억여행:금호여고, 영천여중, 대보중(2024년 7월 4일) 14
1.1. 금호여자고등학교 추억여행 20
1.1.1. 제자의 대학원서 제출하려고 대학 담장을 뛰어넘는 선생님 24
1.1.2. 교장실로 찾아온 금호여고 제자들 28
1.1.3. 금호여고 학생부장에게 사기당할 뻔한 예천 양옥 대금 32
1.2. 영천여자중학교 추억여행 34
1.2.1. 영천여중 학생끼리 결승전을 다투는 영천시 교육청 독서골든벨대회 40
1.2.2. 인솔 책임자로 수학여행 떠난 교장 선생님 44
1.2.3. 벽을 타고 오르는 교장 선생님 47
1.2.4. 영천교육 실적보고회에서 상을 받는 영천여중 교장 51
1.2.5. 제49회 졸업생 타임캡슐에 보관할 보물들 56
1.2.6. 2026년 2월 1일(일) 낮 12시 개봉하는 영천여중 제49회 타임캡슐 60
1.2.7. 학부모 교실 운영의 날에 학부모님으로부터 받은 편지 64
1.2.8. 영천여중 나의 후임 초빙 교장 공모 심사 68
1.2.9. 부부가 함께 받는 교장퇴직 연수 73
1.2.10. 염해일 교장의 정년 퇴임사 77
1.2.11. 정년퇴직 기념문집 발자국에 실린 ‘아내의 생일’로 수필가로 등단 80
1.2.12. 수필가로 등단한 ‘아내의 생일’에 대한 심사평과 당선 소감 84
1.3. 대보중학교 추억여행 86
1.3.1. 대보중 입학식에서 교장의 환영사 92
1.3.2. 간이식 후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준 대보중 교장 사택 94
1.3.3. 대보중과 결연 맺은 대구 경한 라이온스클럽 회장 이취임식에서 축사 97
1.3.4. 학생 전체 조회에서 훈화 ‘호미곶 사랑’ 99
1.3.5. 학생 전체 조회에서 훈화 ‘오바마 대통령과 한국 교육’ 101
1.3.6. 학생 전체 조회에서 훈화 ‘책은 지식의 보고’ 104
1.3.7. 스승의 날에 예천 공군부대 공군 소장님의 자식 교육 훈화 107
1.3.8. 대보중 졸업식에서 교장의 회고사 109
1.3.9. 호미곶을 떠나면서 학생들에게 이임사 111
1.3.10. 캐나다에서 어학연수 중인 손주 민이, 연이에게! 113
1.3.11. 손주들 어학연수 따라간 맏며느리에게! 116
1.3.12. 도민 체전에 참가한 영천여중 선수들 격려차 호미곶을 찾다. 119
2. 두 번째 추억여행:고향 부모님 산소, 지보초등, 풍양초등(2024년 7월 29일) 124
2.1. 고향 부모님 산소, 염해일 타임캡슐, 자연장 부부 형 평장 묘 추억여행 129
2.1.1. 타임캡슐 표지석과 와비, 자연장 부부 형 평장 묘 비에 새긴 글 134
2.1.2. 교육대학 졸업 두 달 전에 신붓집 마당에서 구식결혼 144
2.1.3. 어머님이 주신 귀한 보물들 148
2.2. 지보초등학교 추억여행 151
2.2.1. 묵 신행 구식결혼 후 우리 집 결혼식하고 첫 숙직 때 일어난 사건 161
2.2.2. 교직 생활에서 제자의 죽음 회상 164
2.2.3. 선생님이세요(?) 168
2.3. 풍양초등학교 추억여행 172
2.3.1. 초임 발령받은 풍양초등 근무 시 추억 180
2.3.2. 첫 발령 받은 여름방학에 우리 집 우물을 파는 선생님 182
1. 출생지: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어신리 356
2. 현주소: 대구시 수성구 국채보상로 966-9
3. 학력:
(1) 안동교육대학, (2) 한국방송통신대학(제1회 졸업), (3) 영남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교육학 석사)졸업, (4) 중등교사 자격 검정고시(준교사 국어) 합격으로 중등으로 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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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직 경력
1) 교사 경력: 풍양초(예천), 지보초(예천), 예천초(예천), 용궁 종합고등학교(예천), 예천농업고등학교(예천), 금호여자고등학교(영천), 경산고등학교(경산), 감천고등학교(예천), 문경서중학교(문경), 선산 여자고등학교(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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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감 경력: 다인 종합고등학교(의성), 진평중학교(구미), 장산중학교(경산)
3) 교장 경력: 대보중학교(포항), 영천여자중학교(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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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 중, 고 열다섯 학교에서 42년간 근무한 후 2011년 2월 14일 영천여자중학교 대강당에서 교장으로 정년 퇴임식(대통령으로부터 황조근정훈장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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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정년퇴직 후 경력
1) 금빛평생교육봉사단 활동
(1) 대구 서부도서관에서 어르신 한글 교육봉사
(2) 다문화 가정(베트남) 학생의 한국어 지도 봉사,
(3) 대경뿌리학교 교육위원으로 초, 중, 고 현장에 나가 학생들에게 뿌리교육과 전통놀이 지도,
(4) 대구 문화지킴이 회원으로 문화재 보호 활동.
*2017년 12월 15일 대구시 교육감으로부터 최우수 금빛평생교육봉사단원으로 선정되어 감사패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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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일신문의 자매지 시니어 매일 기자
(1) 2019년 1월 29일에 매일신문의 자매지인‘시니어 每日’1, 2차 기자 시험에 최종 합격하여 기자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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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수필가로 등단
(1) 2011년 6월 18일 순수종합문예지인 ‘월간 문학세계’와 ‘한국문학 세상’ 신인문학상에 동시에 응모하여 동시에 당선되어 수필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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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필가로 등단한 후 200자 원고지 40매 내외의 생활수필을 써서 매주 월, 목, 토(화)요일에 페이스북과 다섯 곳의 인터넷 카페에 올리고, 300여 명의 나의 글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음, 글을 보내지 않는 나머지 요일에는 나의 생활을 동영상으로 찍어 키네마스터로 편집하여 올린 유튜브 2,300편을 나의 글 친구들에게 카톡으로 보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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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모아 해마다 두 차례 설과 추석 명절에 수필집을 출간하여 지금까지 스물일곱 권을 출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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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출간한 수필집
발자국(정년퇴직 기념수필집)> <교장 선생님의 일기> <맛깔스런 댓글이 달린 수필가의 일기> <동기들 방에서 나눈 행복한 대화> <신명 나는 밀실의 행복> <카페 회원들이 동참한 맛 나는 수필> <인생 삼모작> <은퇴 후 또 다른 삶> <간이식 수술 후 덤으로 사는 행복> <종심에 누리는 행복> <수필가의 인생 열차> <인생 삼 막 공연 중> <작가의 영혼을 춤추게 하는 글 친구들> <열정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남유럽 여행>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간이식 후 수필가가 찾은 행복> <수필이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여행> <글 친구들과 함께 글을 쓴 2014년으로 수필여행> <타임캡슐로 코로나를 극복하다>, <열정과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남유럽 여행><겨울왕국의 백야의 나라 북유럽 여행><죽기 전에 꼭! 한번 가 보아야 할 미국 동, 서부 여행>, <자연이 아름다운 호주 여행>, <지열의 북섬과 만년설의 남섬이 조화를 이루는 뉴질랜드 여행>, <카페 회원들의 맛깔스러운 댓글과 답 글이 달린 실크로드 답사> <한/러/일 롯데 크루즈 여행>, <장강 삼협 크루즈 여행>, <태국의 방콕, 파타야 여행> <수필가 염해일 교장, 기자로 변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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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염 해일의 타임캡슐
1) 정년퇴직하던 해에 영천여자중학교 제49회 졸업생들에게 타임캡슐을 묻어 줌
(1) 묻은 날: 2010년 11월 24일
(2) 보관한 물건: 영천여중 제49회 졸업생 231명이 졸업 후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취업이 되었을 15년 후 31살이 될 자기에게 쓴 편지, 교복과 중학교 시절에 즐겨 먹었던 과자 외 추억이 될 만한 학창 시절에 사용한 물건 26점
(3) 열어보는 날: 중학교 졸업 15년 후인 2026년 2월 1일(일요일) 낮 12시 모교 타임캡슐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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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향 예천 부모님 산소 옆에 염 해일의 타임캡슐 묻음
(1) 묻은 날: 2020년 5월 3일(일)
(2) 보관한 물건: 염 해일이 출간한 18권의 수필집, 염 해일의 발자취 파일(염 해일의 교육자료 413점과 부모님이 물려주신 12점),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내가 쓴 1,476편의 글과 출판 원고, 일상 생활하면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 저장)
(3) 열어보는 날: 100년 후인 2120년 5월 5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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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일보사 150주년 타임캡슐에 보관
(1) 묻은 날: 2020년 11월 5일 조선일보사 100주년 기념일
(2) 보관한 물건: 염 해일의 타임캡슐에 보관한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외장하드 사본과 여덟 명 손주들에게 쓴 편지
(3) 열어보는 날: 50년 후인 조선일보사 150주년인 되는 2070년 3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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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2007년 여름에 간암 진단받고, 외국에 나가 통 간이식 받음>